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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의 『젊은그들』小考 - 역사의 통속화와 친일화
1 대원군과 명성황후 조선조 말기의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한 사적 평가가 상반되는 견해들 속에 지속되어 오고 있는 것처럼 그들에 관한 작가들의 재구성 작업 또한 서로 견해가 엇갈리는 입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글은 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한 작가들의 견해를 김동인의 『젊은 그들』1)을 중심으로 비교하면서, 그 무렵의 김동인의 작가적 태도와 그 역사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1)『동아일보』, 1929. 9. 2 - 1931. 11. 10.
2『젊은 그들』의 역사적 사건들
『젊은 그들』을 역사소설 아닌 시대물이었노라고 작가 자신이 회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문학사가들은 이를 의심없이 역사소설로 여기고 있다. 그것은 그 소설에서 역사적 인물들과 관계된 역사적 사건을 취급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대원군의 실각, 이재선의 역모, 임오군변과 대원군의 재집권, 명성황후의 잠적과 국상(國喪), 대원군 피납(被拉), 대원군의 재실각 등등이 『젊은 그들』에서 다루는 주요 역사적 사건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인간적 정치적 갈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소설의 배경이 되어 있다.
2-1 대원군의 실각 1) 때는 광무주 십 팔 년 신사였다. 얌전하고 정숙하다는 평판이 높던 민비(閔妃)가 갑 자기 세력을 펴며, 조선 역사 이래로 가장 큰 권세를 잡았던 대원군 이하응을 궁중에서 내어쫓고, 스스로 외교와 내정의 온갖 권세를 잡은 지도 이미 팔 년, 일찍이 태공이 세웠 던 온갖 제도와 시설은 민비의 정책으로 모두 없어져 나가고, 궁중과 정부는 한낱 당파싸 움에 온 힘을 다하였으며, 무당. 판수. 점쟁이. 술객들이 궁중에 출입하고, 가무와 유연(遊 宴)이 궁중의 유일한 행사였으며, 그 때문에 태공이 저축하였던 창고는 모두 비고, 그 많 은 사치와 연회의 비용을 구하기 위하여, 관리는 학정을 하여 백성의 피를 빨아들이는 그 때였다.9)2) 십년이 지났다. 민비가 차차 세력을 펴기 비롯하였다. 그와 동시에 태공은 섭정이라 는 명색을 그냥 지닌 채로 궁중에서 멀리함을 받았다. 또 오년이 지났다. 운현궁에 숨어 있는 늙은 영웅 이하응의 마음에는 불만과 외로움이 차차 더하여지고, 궁중은 사치와 연락(宴樂)으로 일을 삼으며 관리는 토색을 하여, 정국은 차차 어려워갈 때에 소안동에 활민숙(活民塾)이라는 서재가 생겼다. 제자로서는 민비에게 학대받아서 뜻을 잃은 명문집자손 열 너덧 살씩 난 아이 스물을 모아들였다. (p.13) 3) 정치에 대한 왕비의 간섭과 간관(諫官) 최익현의 태공 탄핵에 대한 정부의 관대한태도에 노하여 분연히 양주 곧은골로 내려간 태공에게는, 자기가 내려가면 당연히 왕에게서 맞으러 사람을 보내리라는 예산이 있었다. 적어도 보내지 않을 수 없으리란 자신이 있 었다. 그러나 그 때 벌써 왕의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서 비에게로 간 때였었다. 태공은 그 것을 몰랐다. 헛되이 양주 곧은골서 얼마를 왕의 부름을 기다리다가 참지 못하여 왕궁으로 돌아온 때는, 궁중과 부중은 벌써 민씨의 세력 아래 들어가 있었다. 태공이 멀리하였 던 사람들은 모두 정부의 긴한 자리를 차지하였고 태공이 긴히 쓰던 사람들은 모두 정배 를 가거나 멀리함을 받았다. 이리하여 궁중과 부중은 조선백성의 것이 아니고 민씨 일당의 것으로 변하였다. 그 뒤 민씨 일당의 정치는 과연 놀랄 만한 것이었다. 자기네들 아래 는 수없는 무리가 광명을 향하여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을 듣지 못하는 그들은, 정치를 다 못 자기네 일파의 세력확장에 썼다. 그리고 자기네의 세력을 펴기에 급급한 그들은 필연 의 결과로써 태공의 세력을 꺾기에 온 힘을 썼다. (p.25) 인용글 1)의 “광무주 십 팔 년 신사”는 작품상의 현재적 시점(時點)(1881년) 이고 “민비가...외교와 내정의 온갖권세를 잡은 지도 이미 팔 년”이라는 언급은 대원군의 실각(1873년)을 기점으로 환산된 기간이다. 인용글 2)의 “십 년이 지났다”의 ‘십년’은 처음 집권한 이후 십년이 지났다는 뜻이고(1873년), “오년이 지났다”는 실각 이후의 오년(1878년)이다. 인용글 3)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작품상의 현재적 시점에서 8년 전인 실각 당시(1873년)의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인용글 1), 2), 3)이 모두 사실은 대원군의 실각에 초점이 형성되어 있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젊은 그들』의 작품상의 기간은 1년(1881년-1882년)이지만,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언급되어 있는 이런 기간(期間)들이 의미하는 것은 대원군의 실각 이후 일어난 일들을 주요 화소로 삼겠다는 작가의 의도를 내비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대원군의 실각, 그것은 이 소설의 바탕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8) 대원군 : 흥선대원군, 대원군, 대원군 이하응, 국태공, 태공, 섭정공, 대감, 대원위.명성황후 : 민비, 왕비, 비, 중궁. 『운현궁의 봄』과 『전야』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종친으로서의 한과 위험을 처절하게 견디던 대원군이 마침내 집권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소설화한 것이다. 집권하기까지의 대원군의 생애는 그것을 다루는 식민지의 작가들에게 부담이 비교적 가벼웠던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원군의 분노의 표적은 60여 년 동안 이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부패와 사치 속에서 매관매직을 일삼는 외척 안동김씨 문중이었기 때문이다. 총독부의 눈치로부터 얼마든지 자유롭고 대단히 드라마틱한, 그러면서도 은연중 민족의식을 일깨워 식민지시대 역사소설의 기본임무에 섭섭하지 않게 기여하는 대원군 정치인생의 전반부는 그것을 다루는 작가들에게 꿩 먹고 알 먹는 만족감을 제공하기도 했을 것이다. 집권 이후의 얘기를 다룬 박종화의 『여명(黎明)』에서도 대원군의 척양(斥洋)은 강조되어 있지만 대원군의 척왜(斥倭)에 관하여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실각 이후의 대원군을 다룬 『젊은 그들』이다. 실각 이후의 대원군은 조선총독부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거북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의 과격함과 집요함과 완고함은 국내정치에 있어서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민족주의자로서 인상깊게 자리매김되어 있거니와 특히 대외정책에 있어서 그는 유별난 쇄국정책과 더불어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는 척양 척왜(斥洋 斥倭)의 화신처럼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실각 이후의 대원군의 생애가 조선총독부에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이유는 그 기간의 대원군의 생애를 다루기 위해서는 명성황후라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거론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조선총독부의 입장에서 명성황후는 대원군보다 더 위험하고 진땀나는 존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청일전쟁 이후, 전쟁에 이기긴 했지만 러시아의 뒷심에 밀린 일본은 울며 겨자먹기로 기껏 점령했던 요동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돌려주었다. 명성황후는 그 러시아에 정성을 기울임으로써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고, 명성황후의 그러한 외교정책은 조선을 대륙정복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커다란 암초와 같았다. 그들은 은밀히 명성황후 제거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주지하는 바 일본의 국가권력이 동원된 을미왜변(乙未倭變)(명성황후 시해사건, 1895년 8월 20일)은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의 야만적 밑그림이다. 그것은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저질러놓은 씻을 수 없는 원죄다. 그들은 그 세기적 원죄를 감추기 위하여 명성황후의 시신을 궁궐 안에서 불태워 행방불명으로 처리했고 곧 이어 억지 왕명으로 왕비를 폐서인시키기도 했다. 시해당하는 그 시각에 맞추어 대원군을 억지로 입궐시킴으로써 마치 대원군이 사태를 이끈 장본인인 것처럼 위장하기도 했다. 왕비에 대한 대원군의 집요한 증오심을 일본인들은 그들의 범죄를 은폐하는 방패로 이용했던 것이다.10) 그들의 만행은 그러나 그들 뜻대로 암장되지는 않았다. 시해 현장을 목격한 내외국인들에 의해서 이 야만적 사건은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고 일본은 국제적 비난에 휘말린다. 그러한 국제적 여론에 밀리어 일본은 이 사건과 관계된 미우라 고로오(三浦梧樓)를 송환하고 그 직위를 박탈했으며 조선궁궐에 난입하여 왕비를 시해한 무리 48명을 히로시마 감옥 미결감에 수감했다가11) 이듬해 1월 21일 범행의 증거가 명백히 밝혀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원 무죄석방한다. 10) 한편 미우라는 왕비시해사건에 관련된 문제로 우치다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 다. “이번 사건은 대원군이 일체의 책임을 지기로 했으니 걱정할 것 없다. 단지 외국 공 사들이 일본인들이 가담한 사실을 문제삼을 우려가 있지만 그 점은 대원군과 평소에 친교가 있는 일본인들이 대원군의 청탁으로 가담한 것이라고 변명하면 된다. 그래도 부 득이한 경우가 생기면 그 중의 몇 명을 중형에 처하거나 스무 명쯤 조선에서 출국시키 면 그만이다.” (유홍종, 『명성황후』, 현대문학북스, 2001, p.299), 한편, 고바야까와(한 성신보 주간)는 8월 22일자 기사에서 ‘대원군 입궐’이라는 제목으로 사변의 원인을 왕실 의 실정과 훈련대의 불만세력과 대원군의 야심으로 돌리는 내용을 게재했다. 유홍종, 위의 책, p.299.
일본의 국가권력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힌 아내의 장례식을 고종이 3년(1895년 8월 20일 - 1897년 11월 21일)이나 미루고 있는 동안, 미우라 고로오가 내세운 친일 김홍집 내각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단발령을 강행한다. 그들은 왕과 세자의 상투를 자르게 했고 경무사와 순검들도 길거리에서 강제로 사람들의 상투를 잘랐다. 국모 시해로 짓밟힌 국민적 자존심과 상투가 잘리는 문화적 인간적 굴욕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켰음직한 일이다. 히로시마 법정이 왕비 시해범들을 무죄로 석방한 것도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곳곳에서 산발적인 반일 의병이 일어났다. 김홍집은 당시 각 지역의 의병봉기 때문에 한양을 떠나 있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가까스로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하여 연금상태에서 벗어난 국왕은 김홍집 친일내각 각료들에게 체포명령을 내린다. 그는 입궐하였다가 아관파천 소식에 놀라 다른 각료들과 함께 러시아 공관으로 가려고 광화문을 나섰다. 문 밖에는 분노한 군중이 운집해 있었다. “저놈 죽여라 친일대신이다.” 칼과 몽둥이를 치켜든 백성들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저놈이 국모를 돌아가시게 하고도 아직 살았다.” 김홍집의 가마는 돌다리를 건너자 더 나아갈 수 없어졌다. 그는 사 린교에서 내려 군중들 앞에 섰다. 바로 곁에 일본군 수비대가 있었다. 일본군 하나가, “이리로 피하시오. 얼른 들어오시오.”하고 소리쳤으나 김홍집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러분 , 당신네들의 말이 옳소 나는 죄인이오, 나를 처형하시오.” 경무사 소흥문(蘇興門) 이라는 자가, “용서하십시오” 일례하고 칼을 차켜 김홍집의 어깨를 내리쳤다고 전해진다. 쓰러지는 그 몸에 군중은 매질, 돌팔매질을 했다. 시신은 찢기며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종로 네거리에 매달려 몇 며칠 방치되었다.12)
김홍집뿐만 아니라 당시에 농상공부대신 정병하도 탁지부대신 어윤중도 분노한 백성들에게 맞아죽었고, 유길준과 조의연은 일본군 막사로 피신했다가 장박 등과 함께 일본으로 달아났다고 각종 자료들은 전하고 있다. 12) 강신재, 『명성황후』, 소담출판사, 2001, p.299.
인용글 1), 2), 3)에서 보면 식민지시대의 작가 김동인은 거침없이 그 알라죤의 입장에 서 있다. 인용글 1), 2), 3) 뿐만 아니라 『젊은 그들』 전편을 통해서 김동인은 틈날 때마다 명성황후야말로 부정부패와 매관매직과 사치로 대원군이 터닦아놓은 국기(國基)와 국부(國富)를 좀먹는 장본인으로 통렬히 매도하고 있다. 『젊은 그들』 전편을 통해서 명성황후는 시아버지의 은혜를 배반한 며느리, 시아버지를 궁궐에서 내쫓은 며느리, 시아버지의 뺨을 때리는 며느리, 부자간을 이간질시키는 며느리, 그리고 나라를 요모조모로 거덜내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왕비다. 대원군의 입장에서 보면 명성황후를 왕비로 간택한 것은 그가 겪은 실수 중에서 가장 원천적인 실수였다. 이 글 2-3, “대원군의 재집권과 재실각”에서 상론되는 명성황후에 대한 대원군의 살의(殺意) 속에는 그 원천적 실수에 대한 뼈를 깎는 후회가 짙게 깔려 있다.
2-2 이재선의 역모사건 이성계의 쿠데타에 의하여 건국된 조선왕조는 그 태생적 원죄 때문인지 나라가 망할 때까지 무수한 역모사건에 시달린다. 조선왕조의 거의 모든 군왕들에게 고착화된 것처럼 여겨지는 그 역모 콤플렉스는 부자간, 형제간, 숙질간의 골육상쟁과 군신간의 피바람을 끊임없이 일으키곤 했다. 군신유의 부자유친 형제우애 장유유서 부부유별 등등의 유교이념이 조선왕조에서 특히 강조되었던 것도 그 고심의 역모 콤플렉스로 빚어진 아이러니가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주지하는 바처럼 그 역모사건들 중에는 성공한 것도 있고 실패로 끝난 것도 있고 날조된 것들도 있다. 권력다툼으로 날조된 역모사건들이 훨씬 많다. 인용글 4)에서 거론되는 이재선 사건도 그 수많은 날조 역모사건 중의 하나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이재선 역모사건을 언급하기에 앞서 김동인은 먼저 집권층의 파렴치한 실정을 나열, 그를 비난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민씨 일당은 그것만으로 부족하여 태공의 아들이며 왕의 동기인 이재선을 역모라는 명목 아래 잡아 처형하였다. 재선은 태공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여...역모라는 명목 아래 잡아 처형하였다.’라는 표현은 이재선 역모가 조선왕조에서 무수히 자행된 파렴치한 날조 역모 중의 하나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한 방법이다. ‘온갖 파렴치한 실정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집권층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심지어 국왕의 형, 더구나 대원군이 사랑하여 마지않는 맏아들을 역모라는 거짓 명목으로 처형할 만큼 파렴치한 정권이었다.’라는 것이 인용글 4) 후반에서 김동인이 강조하고 싶은 핵심 내용인 것이다. 인용글 4)의 앞부분은 대원군의 유난한 독재를 ‘엄격한 정치’로 변명하고, 일부 선비들이나 유생들, 그리고 일부 백성들의 반감을 사게 된 것을 인정하면서 그게 모두 백성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야기된 부작용인 것처럼 대원군의 행적을 미화한다. 그것은 후반부에서 집권층의 파렴치함을 강조하기 위한 정지작업이다. ‘일부 선비, 일부 백성’ 같은 표현은 예나 이제나 독재자들이 자기네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즐겨 쓰는 현실을 왜곡시키는 어법이다. 대원군은 집권기간 동안 잘한 일도 있고 잘못한 일도 있다. 외척의 세도를 일소하고 탐관오리와 지방토호들의 백성학대를 엄금한 점, 출신지, 계급, 신분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인재를 등용한 점, 나라 살림을 좀먹는 유생들의 소굴이기도 했었던 서원을 대폭 정비한 점, 여러 법전들을 편수 완비하여 정치기강을 확립하고 중앙집권적 체재를 강화한 점, 사치를 엄금하고 군포(軍布)를 호포(戶布)로 개정하여 양반 서리의 특전을 없애고 반상을 불문하고 세금을 부과한 점 등이 잘한 일들이라면, 경복궁 중건에 따른 경제적 혼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진 점, 외국인 신부들을 포함한 일만 여명의 천주교도를 무참히 학살한 점, 세계정세에 어두운 쇄국정책으로 정치 사회적 역기능을 자초한 점 등은 잘못한 일로 알려져 있다. 잘한 일이든 잘못한 일이든 그것들이 모두 그의 유난한 독재에 의해서 결과된 것들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원군 실각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최익현의 상소문은 대원군 집권기간 중의 총체적 실정을 통렬히 직언하고 있거니와, 선비들과 유생들을 내세움으로써 인용글 4)는, 대원군의 잘못을 언급하는 체하면서 은연중 만동묘 철폐와 서원정비라는 비교적 잘한 일 쪽에 속하는 부분을 연상하게 한다. 독자로 하여금 대원군 독재의 그늘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게 하는 문맥이다. 실각 이후 대원군은 몇 가지 역사적 사건들의 배후로 혐의를 받게 되는데, 그 중 역모와 관계된 것이 두 건이다. 이재선 역모와 이준용 역모가 그것이다. 이재선은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이고 이준용은 그의 장손이다. 두 역모사건 모두 운변인물(雲邊人物 : 운현궁 주변의 인물)들에 의해 주도되다가 실패로 끝난 사건들이다. 김동인은 『젊은 그들』에서 거론되는 주요 역사적 사건마다 반드시 명성황후를 연결시켜 그를 비난하는 틀을 유지한다. 그 사건들이 모두 명성황후 탓이라는 한결같은 입장이다. 실각 이후 대원군과 관계된 주요 역사적 사건 중 『젊은 그들』에서 전혀 거론되지 않은 사건이 두 건 있다. 하나는 경복궁 희정당(명성황후의 처소) 화재사건이고 또 하나는 민승호(명성황후의 오빠) 일가족 폭사사건이다. 희정당 화재 사건은 단순화재가 아니고 명성황후를 살해하기 위해서 폭약을 장치하여 터뜨린, 폭발을 겸한 방화사건이다. 민승호 일가(민승호의 어머니, 민승호, 민승호의 아들) 폭사사건은 선물 배달로 위장된 폭발물 사고다. 김동인이 『젊은 그들』에서 이 사건들을 거론하지 않은 이유는 두 사건 모두 명성황후나 민씨일파에 대한 살의를 명백히 드러낸 사건이어서 이 사건을 명성황후를 비난하는 소재로 삼을 경우 이 사건에 대해서 대원군이 받고 있는 강력한 혐의를 더 짙게 하는 필연적인 역효과를 예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젊은 그들』과는 달리 이 두 사건들을 다룬 다른 작가의 소설들은 한결같이 대원군의 묵인 하에 운변인물(雲邊人物)들에 의해서 대원군의 집권을 위하여 저질러진 사건임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방향으로 서술되어 있다.16) 이준용 역모사건은 『젊은 그들』의 작품상의 시기보다 훨씬 뒤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할 필요가 없지만, 내세워진 인물이 대원군의 아들이냐 손자냐 하는 점과 그 시기나 방법이 서로 다를 뿐, 대원군을 배경삼아 그의 집권욕에 의해서 결과되었다는 점에서는 이재선 역모사건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이재선 역모사건에 대해서도 이를 다룬 다른 작가들은 인용글 4)에서 보이는 김동인의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17) 16) 강신재, 앞의 책. 유홍종, 앞의 책. 줄리에뜨 모리오, 앞의 책. 신봉승, 『대원군』, 금성 출판사, 1988. 유주현, 『대원군』, 삼성출판사, 1974 등.
식민지시대의 작가 김동인 말고는 사학자든 작가든, 이재선의 역모를 날조된 역모사건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날조가 아닌, 대원군의 집권욕이 빚어낸 비극이다. 김동인은 대원군의 그 추악한 집권욕을 오히려 명성황후의 집권욕으로 날조함으로써 이 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대원군을 더욱더 부당하게 핍박받는 영웅으로 여기게 만들고 명성황후에 대한 비난을 상대적으로 증폭시키게 한다. 인용글 4)의 서술태도는 두 가지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 먼저는 대원군의 영웅적 독재의 그늘을 변명하고자 하는 것이고 다음은 명성황후의 파렴치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젊은 그들』 전편을 통하여 틈만 있으면 동원되는 이러한 대조적 문법이 두 인물 중 누구에게 더 비중을 두고 있는가는 표면상으로는 자명하다. 표면상으로 김동인은 대원군의 영웅적 민족주의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의 정적인 명성황후를 사사건건 모질게 폄하한다. 『젊은 그들』 속의 대원군은 며느리에게 내쫒긴 억울한 시아버지이며 집권층으로부터 온갖 누명을 쓴 채로 그것을 묵묵히 감당하는 핍박받는 재야인사다. 『젊은 그들』을 통해서 김동인은 대원군 실각과 핍박의 모든 원인을, 나라의 부패와 혼란과 민생고의 모든 원인을 명성황후에게 들씌운다. 명성황후만 아니었더라면 대원군이 그처럼 실각당하여 억울하고 핍박받는 세월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나라가 외세에 휘말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백성들이 그토록 참담하게 살지도 않았을 것이고, 마침내 나라가 망해버리지도 않았을 텐데, 그 명성황후 때문에 민족적 영웅이 덧없이 시들고 마침내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는 결론을 독자들에게 유도하는 것이 소설 『젊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중심틀이다. 표면상으로는 대원군의 민족주의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서술태도가 실질적으로는 대원군의 고난을 통하여 명성황후라는 존재의 반민족적 파렴치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두운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분은 순전히 민씨 일당에 대한 그들의 분노와 불 만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선생,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답니다.” “그래, 집안 망 해. 확실히 망해. 암탉이 울면...... 울면......” 히물히물 새끼손가락과 오른편 뺨에는 또 경련 이 일어났다. “개가 절구를 쓰고 지붕에 올라가면 집안 망해요. 여편네란 아이나 기르고 가사나 돌보고 할 게지, 다른 생각을 먹어서는 못씁니다.” 태공은 입맛이 쓰다는 듯이 침 을 타구에다 탁 뱉었다. (p.33)
위 인용글은 대원군과 활민숙 주인 이활민과의 대화장면이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이 말은 『젊은 그들』에서 명성황후를 비난하기 위한 목적으로 몇 차례나 동원되는 속담이다. 이 속담은 본래 우리나라에서 쓰던 것이 아니고 명성황후 생존 당시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던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유포된 말이라고 한다.18) 18) 전 뉴욕 주재 한국 총영사였던 나홍주의 저서『민비암살비판』에는 이노우에가 당시 조선의 왕비를 지칭해서 언급한 암탉론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본 래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말이 없었다. 그 말은 일본공사 이노우에가 조선에 와서 처음 쓴 말로 당시 일본침략주의자가 조선의 주권을 정당하게 행사한 명성황후를 힐난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 전해지면서 사람들은 그 말의 사용 경위도 모른 채 명성황 후를 악평하는 말로 쓰게 된 것은 참으로 슬픈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은 임진왜란 의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후계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남긴 교훈과 유언 중에 나온 말이다. ‘남편은 가정을 보호하고 아내는 가정을 돌보는 것이 세상의 질서이 다. 그런데 반대로 아내가 집안의 보호자가 된다면 남편은 기능을 상실하며 이는 곧 집 안이 망하게 되는 확실한 징후다. 그것은 암탉이 우는 것과 같은 것으로 질서가 없는 것을 뜻한다. 모든 사무라이들은 이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유홍종, 앞의 책, pp. 244-245, 재인용. >
김동인이 그 속담에 대한 그러한 유래를 모르고 썼을 수도 있지만,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 말을 반갑게 써먹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그는 시종일관 명성황후 비난에 적극적이다. 한반도 식민지화 과정에서 일본공사로부터 그토록 집요하게 비난당했고 마침내 일본의 국가권력의 동원 하에 처참하게 시해당한 그 명성황후가 그로부터 삼십여 년 후, 식민지의 작가 김동인에 의해서 다시 집요하게 비난당한다는 사실은 작가에게나 독자에게나 침통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2-3 대원군의 재집권과 재실각 (임오군변, 명성황후 잠적, 대원군의 피납(被拉)) 5) 사면에 굶어죽은 송장이 널렸다. 거지의 떼가 무섭게 널렸다. 각처에 패가하는 집이 생겼다 그리고 아직껏 자살이라 하는 것을 모르던 이 국민의 사이에도 지금 당하는 쉽지 않은 괴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자살이라는 풍조가 생겼다. 그것이야말로 절실한 필요 때문 에 생겨난 커다란 발명, 혹은 발견이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황해도의 어떤 선비가 발명하였다는 이 경구는 삽시간에 온 조선에 퍼졌다. 그리고 사람마다 그 말을 외 고는 의미 있는 듯이 한숨을 쉬곤 하였다. 왕비에게 대한 온갖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기 괴망측한 말까지 많았다. 기괴한 요강을 비에게 진상하였는데, 왕비는 그 요강을 종일 타 고 앉았다는 이야기들을 그럴듯이 서로 수근거렸다. 왕비에게 가까이 하는 궁녀들은 모두 가 사실은 여인은 아니고 여복한 예쁜 사내란 말을 서로들 속삭였다. 왕비의 이부자리는 개켜져본 적이 없다고 서로들 입을 삐쭉거렸다. 뿐만 아니라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까지 많이 돌았다. 그렇듯 ‘아직껏 지배자에게 무관심하던’ 이 국민은 왕비를 밉게 본 것이었다. 유언과 비어는 각처에서 일어났다. 정도령이 계룡산에서 군사를 일으킨다고 계 룡산을 향하여 솔가하여 떠나는 무리가 뒤를 이어서 생겼다. 머리에 흰 뿔 달린 괴조(怪 鳥)가 매일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광화문 앞 해태 위에 와서, 서른 번씩 불길한 소리로 울고는 어디로인지 날아가버린다고, 새벽 일찍이 해태의 주위에는 그것을 구경하러 오는 무리가 장꾼같이 모이곤 하였다. 서른 번이라 함은 비의 그 해의 나이와 같은 숫자였다. (pp.76-77)
임오군변은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장악하고 구식군대를 업신여긴 집권층의 잘못도 있었지만, 구식군대의 불만과 그로 인하여 야기된 사회적 혼란을 이용,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던 대원군의 집권욕이 적극적으로 개입되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 사건이다. 급료에 대한 불만 때문에 충동적, 우발적으로 발생한 구식군대의 반란은 대원군에 의해서 조직적인 폭력세력으로 변한다. 이재선 역모사건으로 풀이 꺾여 있던 대원군은 운변인물들을 동원하여 반란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궁궐에 난입한 반란군들은 대궐로 피신해 있던 민겸호, 김보현 등 대신들을 그 자리에서 쳐죽이고 이어서 왕비를 찾아 궁궐을 모두 뒤지고 다녔다. 사가(史家)들이나 작가들이나 대원군과 운변인물들에서 확대 지휘되었다는 이 임오군변에 관한 견해는 거의 비슷하다. 『젊은 그들』의 경우만 약간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대원군의 개입이 역사서나 다른 작가의 소설에서보다 최소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감, 중궁을 내어 주시오” “나는 모른다. 지금 너희들이 대궐을 침범한다기에 급히 입 궐하는 길, 중궁마마는 어디 계신지 모른다.” 그러나 뭇 입은 다시 부르짖었다. “중궁을! 중궁을! 대감, 중궁을!” “중궁마마를 왜 찾느냐?” “원수를 갚겠습니다.” ‘원수!’ 극도로 긴 장되었던 태공의 마음이 순식간에 풀림을 따라서, 그의 눈에는 콱 한 껍질 눈물이 씌워졌 다. 난군이 대궐을 침범하였다 하나, 그것은 결국 반역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로 지 자기네를 아직껏 괴롭게 하던 중궁에 대한 원수를 갚으려 함이었다. (p.205)
임오군변 당시 궁궐에 난입한 난군들이 명성황후를 죽이기 위하여 이리저리 찾아다닌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명성황후에 대한 난군들의 이러한 살기(殺氣)는 폭도화한 난군들을 운변인물들이 주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궁인으로 변복하고 무예별감 홍계훈의 등에 업히어 간신히 궁궐을 빠져나온 명성황후는 여주 국망산 아래 초가집에 피신한다. 정권을 장악한 대원군은 끈질기게 왕비를 찾는 난군들을 해산시키기 위하여 행방불명된 왕비의 국상(國喪)을 선포한다. 왕비가 설혹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 궁중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도 섞인 국상선포였다. 대원군이 청나라 군인들에게 납치되어 끌려가는 사건을 마지막으로 소설 『젊은 그들』의 역사적 사건들은 마감된다. 대원군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 청나라 군함에 이송되기 직전에 이 소설의 주인공 재영이가 대원군을 찾아와 이별의 시간을 갖는다. “내가 가면 (이 나라가) 열흘을 견디지 못하리라” “대감!” 태공은 또다시 입을 봉하였다. 마음에 없는 길을 기약없이 떠나는 이와, 가장 애모하던 이를 보내는 젊은이와의 두 사람 은, 마치 두 벙어리와 같이 상대하여 있었다. 한참 뒤에 태공이 혼잣말같이 또 입을 열었 다. “이런 괘씸한 짓을 하리라고는 과연 뜻도 못했었구나!” “대감! 분하올시다” “아아, 국 망! 국망! 국망!” “분하올시다” “네가 그 때 시(弑)할 뜻을 보일 때에 그대로 말리지만 않 았다면, 오늘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을......” “네?” 재영이는 깜짝 놀랐다. “그럼 이 번 일도 역시 그......” “아직 몰랐느냐? 물론 중궁마마의 일이로다. (pp.258-259) 임오군변을 통한 대원군의 재집권과 납치사건으로 인한 재실각은 명성황후에 대한 대원군의 저주와 살의(殺意)로 점철되어 있다. 인용 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에 이르러 그 미완의 살의는 한결 적극적이다.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활민숙생들의 집단자살과 남녀 주인공들의 동반자살은 대원군의 납치사건과 더불어 그것들이 모두 명성황후가 원인을 제공한 비극이라는 결론으로 귀납된다. 그들의 비극이 안타까우면 안타까울수록 상대적으로 명성황후에 대한 원망과 저주가 증폭되는 것이 이 소설의 기본짜임이다. 명성황후를 죽이기 위하여 난민들은 궁중을 휘젓고 다녔다. 그들은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고 외친다. 대원군은 명성황후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몇 차례 있었는데도 차마 죽이지 못한 것을 마지막까지 후회하고 있다. 그로부터 13년 후 일본은 국가권력을 동원, 조선 궁궐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임오군변 당시 궁궐에 난입, 원수를 갚는다며 왕비를 찾아다니던 이 나라 백성들의 한, 억울하게 실각당했고 외국 군대에게 절망적으로 납치당한 대원군의 한, 집단자살, 동반자살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의 한, 명성황후를 죽이지 못한 소설 『젊은 그들』의 한을, 이 소설의 문맥대로라면, 고맙게도 13년 뒤에 일본 낭인들이 풀어준 셈이다.
3 역사의 통속화와 친일화 이 글은 식민지시대의 소설 『젊은 그들』에서 대원군을 핍박받는 불우한 영웅으로 우상화하고 명성황후를 몹쓸 왕비로 비난한 작가의 반복된 서술태도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이 글에서 인용한 부분뿐만 아니라 소설 『젊은 그들』 도처에서 산견되는 문법이다. 『젊은 그들』에서 주문처럼 반복되는 그 문법은 표면상으로는 고난받는 불우한 영웅 대원군의 우상화에 기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명성황후에 대한 비난과 증오를 증폭시키는 쪽에 더 크게 기여하고 있다. 명성황후에 대한 비난과 증오를 증폭시킴으로써, 한반도 식민지화 과정에서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일본이 저질렀던 원죄(명성황후 시해사건)를 희석시키고자 하는 것이 작가의 숨은 의도였다는 것을 이 글은 확인하고 싶었다. 『젊은 그들』이 발표된 지 10년 후인 1939년에 김동인은 ?『젊은 그들』의 회고?19)라는 글을 잡지에 발표한다. 이는 대략 30매 분량의 길지 않은 글인데 그 중 거의 절반 분량이 “담배값까지조차 끊어지도록 곤궁한 처지에 있었”던 가난뱅이 소설가의 사연을 비교적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젊은 그들』이 그 가난 때문에 할 수 없이 쓰게 된 통속소설이라는 것이 그 글의 중심내용이다. 그리고 그 글에서 김동인은 『젊은 그들』의 독자들을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20) 현진건의 ?적도?가 우리 문학사에서 오랫동안 통속적 신문소설로 외면당해오다가 70년대 이후에 그 진가를 인정받고 있는데, ?적도?는 아닌게 아니라 그 얽히고설킨 남녀관계 때문에 통속소설로 오해받을 소지를 다분히 지니고 있는, 그러나 그처럼 통속소설로 위장해야 했던 식민지 작가의 고통과 진실이 눈물겹기까지 한 소설이다. 작가 자신이 통속소설이라고 폄하한 『젊은 그들』은 어설픈 무협적 재미는 다소 있지만 남녀관계의 감각적 흥미를 추구한 통속적 요소는 그 비중이 아주 가볍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그들』은 그 식민지적 고통과 진실이 거세?왜곡된, 역사의 통속화라는 징검다리를 딛고 일본의 원죄를 함부로 희석시킨 통속적 친일소설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합리화하고자 했던 ?백마강?이 김동인의 대표적 친일역사소설로 알려져 있는데, 이 『젊은 그들』이야말로 ??백마강??보다 훨씬 농도 짙은 친일역사소설이다. 작가 스스로 『젊은 그들』을 통속소설이라고 폄하한 진짜 이유는 이 부끄러운 친일소설을 가급적 읽지 말아달라는 부탁의 왜곡된 표현은 혹시 아니었을까. 그가 비아냥거렸던 『젊은 그들』의 독자들은 시대적 관심을 집중시키게 하는 역사적 인물들(대원군과 명성황후)에 대한 작가의 서술태도가 소설적 반전이라는 것을 통하여 역전되는 것을 끈질기게 기대한 것은 혹시 아니었을까. 가난 때문에 할 수 없이 신문연재 통속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젊은 그들』의 회고?를 읽으면서 연상하게 되는 것은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이다. 그리고 그 글 끝에 그런 소설을 쓰게 된 자신의 처지를 자조적(自嘲的)으로 덧붙인 백초(白貂, 하얀담비)에 관한 글21)은 식민지시대의 작가 김동인이 겪었던 통속화와 친일화의 궤적을 우리로 하여금 참담하게 되새기게 한다. (小尾) 19) 김치홍, 앞의 책.
참 고 문 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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