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8年
|
1월 1일 ‘천정을 보며’를 대한일보시부문에 응모, 당선됨. 같은 해에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서 당선된 윤흥길을 만남. 裡里市라는 지역이 인연이기도 했지만 유난히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어 서로 裡里市를 떠난 뒤에도 오며가며 일없이 자주 만났음.
|
|
1970年
|
아들딸들과 시골에서 살고 싶어서 공립학교 순위고사에 응시했으나 한 학기가 지나도록 발령이 나지 않아 시골생활을 포기하고 그해 9월에 전주 신흥고등학교로 옮김. 신흥고등학교는 기독교재단이어서 내내 담배를 몰래 피우며 살았음.
|
|
1971年
|
시월유신 이후 <끝>이라는 시를 발표하고는 시쓰기를 그만두고자 마음먹었음. 그러나 마음대로는 되지 않았음.
<폐촌에서>연작을 드문드문 쓰면서 지냄.
|
|
1974年
|
여름, 식도암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심. 어머니는 생전에 아버지에 관한 얘기를 자식들에게 전혀 한 일이 없음. 당신의 한과 앙심을 자식들에게
옮기지 않으려고 아버지에 관한 기록도 다 없애고 입을 다문 채 돌아가신 것으로 여기고 있음. 나는 아직도 아버지에 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음.
|
|
1977年
|
원광대학교 대학원 졸업, 윤동주의 시에 관한 글 <童心의 神話>를 정교영이라는 가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 문학평론부문에
당선. 사진 찍는 일에 매달려 틈날 때마다 암실에 처박혀 살다시피 했음. 인간의 불행과 고통을 사진으로 접근해보고자
했었음.
|
|
1979年
|
10월,박정희 사망 때까지 <암실일기>연작을 쓰고 있었음.
|
|
1981年
|
강인한 김준태 윤재걸 문순태 이보영 등과 어울려 지역문예시대를 열어가자고 의견을 모으고 우선 <민족문학>이라는 무크지 기획에
참여함.
|
|
1982年
|
전라도의 농경언어에 담긴 애환을 한 데 모아보고 싶어서 동진강의 정렬, 금강의 이병훈, 만경강의 정양, 이렇게 셋이서 삼인시집 <어느
흉년에>(도서출판 인동)를 냈음. 박재삼, 김용직 발문.전라도의 시인들을 정선하여 삼인시집을 몇 차례 더 만들 계획이었으나 이어가지
못했음. 임방울의 소리에 끌리어 최동현 심연무 등과 함께 홍정택명창에게서 북과 소리를 두어 달 익힘.
|
|
1990年
|
이리시 마동으로 이사, 심호택,박경원,엄택수,김영춘,정영길,안도현 등과 가끔씩 어울리면서 민족문학작가회의에 관심을 갖게
됨.
|
|
1996年
|
완주군 비봉면 수선리 호숫가에 집을 짓고 2년 동안 살았음.
|
|
2001年
|
1월 전북작가회의 회장직을 4년만에 사임함 5월 전북문화개혁회의 대표 사임
|
| 2004年
|
3월 중국 산동사범대학 교환교수로 갔다가 한 학기만에 살이 9키로나 빠져서 돌아옴 |
|
시 집
|
까마귀떼 (은혜) 1980 수수깡을 씹으며 (청사) 1983 빈집의 꿈 (푸른숲) 1993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 (창작과
비평사) 1997년 까마귀떼 (문학동네 복간) 1999년 눈내리는 마을 (모아드림) 2001년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문학동네) 2005년 나그네는 지금도 (생각의 나무)2006년
|
기타저서
|
詩話集『동심의 신화』(신아출판사) 2002
판소리평론집 『판소리 더늠의 시학』(문학동네), 2001년
* 공편
판소리의 바탕과 아름다움 (인동), 1986.
판소리 단가 (국학자료원) 2002
* 공역
두보시의 이해 (이회), 1994
한국리얼리즘 한시의 이해 (새문사), 1998
두남문집 芝庄洞 (신아출판사) 2006
|
|
수 상
|
제9회 모악문학상 (2001, 모악문학상제정위원회)
제1회 아름다운작가상(2002. 민족문학작가회의 젊은작가포럼)
제7회 백석문학상(2005. 창작과비평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