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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성장통6 달빛 찌르기(1)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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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성장통> 6. 달빛 찌르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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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수를 하면 돈도 잘 버냐?”

  그것을 말이라고 하냐고, 카수해서 뜨면 돈방석에 앉는 거라고, 너는 잘해낼 거라고 친구들은 내 똥줄을 부추겼다. 저녁놀 묻은 동진강 물결이 우리 자리에 다가왔다가 반짝반짝 멀어지곤 했다.

  대학은 가고 싶은데 집안 형편이 협조를 안 해줘서 대학을 버려야 했던 고2 우리는 동진강 뚝방에 앉아 새우깡에 소주를 자주 마셨다. 어떤 가시내 얘기, 누가 누구랑 사귄다는 얘기를 지나 취업해서 돈 벌자는 얘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었는데 그 끝이 노래판이었다. 당시 유행하는 대중가요를 생목으로 내질러댔다.

  조용필이란 가수가 최고 가수였는데 우리는 그가 부른 노래를 거의 다 알고 있었다.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그것은 상관없었다. 목소리 크고 우렁찬 놈이 장땡이었다. 나는 더러 친구들 앞에서 독창을 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내가 카수의 꿈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 친구들은 나더러 노래를 잘한다는 것이었다. 조용필보다도 내 목소리가 훨씬 힘차다는 것이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동진강 뚝방에서 노래 부를 때마다 짜식들은 내 노랫소리에 빨려들어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친구들의 가족도 감동시킬 수 있다. 그 다음은 마을, 그 다음은 읍, 이렇게 가다보면 얼마든지 국민도 감동시킬 것 같았다.

  내가 카수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1980년 10월 동진강 둑길의 오후 여섯 시, 너홉들이 소주 서너 병을 도시락 뚜껑에 나눠 마시고 난 뒤였다. 여기에 음악선생님도 한 손 거드셨다.

  선생님은 나를 피아노 앞으로 나오게 해서 외국 가곡「아, 목동아」를 부르게 하셨는데, 노래를 마치자 너는 성악가가 되어도 대중가수가 되어도 잘할 거라고 이르셨던 것이다. 이제 카수의 길은 피해 갈 수 없다, “이건 내 운명이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도 카수 얘기가 나오면 똥꼬께가 간질간질한데 한참 끼 많을 그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대한민국의 고교생들이 대학입시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나는 허구헌날 동진강 뚝방에 앉아서 막걸리기타를 쳐대고 목을 세웠다.

  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대학에 안 갈 거냐고 누가 물으면 간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공부는 정말이지 내 체질이 아니었다. 막걸리기타를 밀어두고 내 깜냥에는 코피 터지게 공부를 했는데도 모의고사를 보면 성적은 밑바닥이었다. 하지만 대학은 가야 했다. ‘대학가요제’ 그것이 내 운명이니까.

  1982년 1월, 취업을 한 친구들이 내 곁을 떠나갈 때 재수를 결심했다. 단칸방에 내몰린 집안 형편은 말도 아니었다. 나는 말로만 재수생이지 돈이 없어 학원이란 데를 갈 수가 없었지만 아침마다 도시락 싸들고 금암동에 있는 시립도서관에 갔다. 그러나 마음이 벌써 대학가요제 대상에 가 있는 놈에게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책상 앞에 앉은 지 30분도 안 되어 비몽사몽이란 절친한 친구들이 떼로 몰려들었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러다 깨어서 맛보는 낭패감이라니. 그 낭패감을, 나 혼자에게만 주어진 시간을 밤마다 숟가락 마이크를 들고 달랬다.

  삼수. 삼수를 해야겠다고 나는 어머니께 통사정을 했다. 종합반 학원비 한 달치만 챙겨달라고, 다음 달부터는 청소학생이라도 해서 학원비를 벌겠다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애원을 했다. 나는, 어머니가 어딘가에서 꾸어왔을 학원비 한 달치를 가방 속에 감추고 상경했다. 대학에 가야만, 대학가요제에 나가야만 카수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선데이서울」뒤쪽 광고 난에 적힌 ‘신인가수 모집’이란 문구를 보았던 것이다. 1983년 3월 당시엔 종로3가부터 제기동에 이르는 대로변에 ‘밤무대 가수 모집’ 또는 누구의 작곡실이란 간판이 2, 3층 창문에까지 죽 붙어 있었다.



  나는 신설동 어떤 작곡가 앞에 섰다. 몇 마디 물어보더니 노래 한번 들어보자면서 피아노 앞으로 이끌었다. 당대의 최고 가수 조용필보다도 노래를 잘한다고 뻐겼던 나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돌아오지 않는 강」이란 노래를 불렀는데 개망신을 당했다.

  목소리는 그만두고 박자조차 놓쳤다. 노래 1절 하는데 2분이 채 안 걸리는데도 그 시간은 길었고 이마에서 생땀이 솟았다. 노래가 끝나자 작곡가는 목구성이 괜찮으니까 한번 해보자고 권했다. 이게 웬일이냐, 당장 쫓아낼 줄 알았는데 한번 해보자니. 레슨비 받아먹으려는 빤한 수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나는 이 말보다 더 고맙고 소중한 게 없었다.

  숙식은 압구정동 모 일간지 보급소에서 해결했다. 신문 전문배달원이 된 것이다. 오후 3시가 되면 나는 250부의 일간지를 메고 AID아파를 훑고 봉은사 근처까지 배달을 했다. 지금 신문은 대부분이 조간이지만 당시엔 거의 석간이었다.

  신문을 돌리다보면 손바닥아 까매졌지만, 신문을 메고 뛰는 내 모습을 여자동창이 보고 실망했다고 했다지만 개의치 않았다. 서울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노래 지도까지 받는다는 데 이게 어디냐. 신문을 다 돌리고 나면 오후 5시 반쯤 되었다. 부리나케 세수를 하고 신설동에 갔다.

  작곡가 앞에서, 밤업소에 일 나가려는 무명 카수들 앞에서 목소리를 꺾고 감아올리고 바닥에 깔았다. 창피고 뭐고 없었다. 한 달 레슨비를 냈으니 그 값은 어떻든 받아내야 했고 카수를 해도 될 만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으니까. <다음 편에 계속>



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031

[2019-02-07 08:57:49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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