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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너희가 대답하라!
작성자 : 이병초 


이젠 너희가 대답하라!
이병초

  
  문학이 점점 변두리로 밀려난다는 우려 속에 나는 서 있다. 시나 소설이 중심이 된 행사보다도 어떤 문화행사에 구색 맞추듯이 시낭독을 해달라는, 문학이 뭔지를 좀 쉽게 말해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마다 나는 때로 불쾌했다. 모든 문화행사가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더러는 때까치 좆 자랑하듯 몇몇 인사의 낯내기에 불과한 문화행사에 붙들려 맛보기처럼 동료들의 시와 소설이 낭독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괴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정말로 문학은 광고 치레에 불과한 것들에게 제 자리를 내주었는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사실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함에도 나는 지금 전북 작가회의의 지나간 30년과 다가올 30년을 말해달라는 편집자의 청탁에 응해야 한다. 청년문학회 시절 이병천 소설가가 우리에게 일갈 한 “이제는 너희가 대답하라!”라는 화두가 아직도 화두로 남았음을 고백하면서, 작가회의 형님들 누님들께 죄송한 마음을 억누르면서.  

  글을 왜 쓰는가, 하는 질문은 1988년 8월, 민족문학협의회 전북지부가 출범했을 때나 지금이나 간절하다. 여전히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이런 질문에 대처할 시간도 주지 않고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이 곧장 다가온다. 그 마지막 날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자로 만들 것이다.(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작전을 앞두고 도청에 남은 어린 학생을 돌려보내며.)”라고 적었던 이 글줄 앞에서 우리는 절망했다. 군부독재의 민간인 학살- 이 참담한 사실은 노동해방운동으로, 농민운동으로, 통일의 열망으로 불타오르면서 문학의 외연을 확장했지만 아직도 부채감이 태산처럼 무겁다. 동시대의 모순이나 비극을 객관화해낼 수 없는 지점에서 발화된 글줄은 엄밀히 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란 전제에 앞서, 그때 희생된 넋들께 부끄럽지 않은 생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글을 제대로 쓰고 있는가 하는 자책이 앞서기 때문이다.

  어떻게 쓰는 게 글이고 무엇을 써야만 글이 되는가. 이 문제는 현실이냐 미학이냐를 붙들고 다시 한 번 우리의 청춘을 골방으로 내몰았다. 부조리한 현실을 도외시한 언어미학은 작가의 직무유기에 속하는 반편이 문학이었고, 언어미학을 고려하지 않은 문학의 현실적 문제제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국이라는, 분단이라는, 내 주민등록증이 미국 식민지 백성의 증표에 불과하다는 한국의 독특한 정치 현실은- 독일인 노발리스나 미국인 포에서 촉발된 문제의식조차, 진작 세계인이 된 보들레르와 랭보, 말라르메에서 찬란하게 꽃을 피우며 20세기 문학을 그들의 영향력 아래 두었던 최첨단의 문학적 방법론조차 무색하게 했다. 모더니즘이라고 불린 이들의 방법론은 기계와 물질, 거대자본 또는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방식이었음을 모르는 이는 없다. 미래의 세계는 인간을 물질의 노예로 만들 것이며 필연적으로 인간소외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도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런 문제의식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문학적 과제가 있었다. 당대 최고의 선결과제인 통일의 물꼬를 찾아야 했고 경제적 불평등 구조를 해소할 방법을 모색하는 한편 독재 또는 독재정권과 치열하게 싸우는 한편 이들을 싸고도는 친일적, 친미적 기득권 세력들과도 맞장뜨며 언어미학에 공들여야 했던 것이다. 이 지난한 싸움은 어떤 나라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가 힘들 만큼 독특한 것이었고 전북 작가회의 또한 이 지점에서 한 발짝도 비껴있지 않았다.

  세계의 변방에서 벌이는 이 지루한 싸움은 “민족문학 즉 전북작가회의”가 가진 정체성을 확실히 다져나가는 계기이기도 했다. 피폐해진 노동현실, 산업사회에 소외된 농어촌과 청년실업 문제는 역설적이게도 사회역사적 존재감을 묻는 텍스트가 되었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해내는 동력으로 작동되었다. 한국의 미래는 바다 바깥인 강대국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갑오년에 들었던 죽창과 개펄의 상상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글줄로 보여주면서 먹물같이 캄캄한 세상을 먹물로 밝히고자 했다. 전북 작가회의의 문학은 변방의 문학이 아니라 세계문학의 한복판일 것이라는 자부심으로까지 문학적 영토를 넓혔다. 삶이 가진 소소함에까지 온갖 아는 척을 다하는 사람일수록 정작 당사자의 생활은 고루하기 그지없더라는 그 쓸쓸함의 안팎을 껴안는 문학의 품을 키웠다.

  우리는 알았다. 개인의 삶이 세계의 어떤 질서에 둘러싸였든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지키는 동력을 발견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먹잇감에 목적을 둔, 허기에 갇힌 삶일수록 자신의 삶을 지켜낼 동력을 발견하기는 어렵다는 것과 문명이 내민 이중성을 거절하기는커녕-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어간다는 것을 핑계로 소맷동냥하기에 급급한, 단 1초도 손해보고 싶지 않은 사람일수록 문명의 사생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우리는 깨쳤다. 우리들 중엔 작가회의 소속이면서도 먹고살아야 하는 이유 때문에 창작활동을 못하는 회원은 있을지언정, 작가회의 회원이면서 회비를 한 푼도 내본 적이 없는- “작가회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며, 작가회의 소속 작가들 중 한 사람도 내 성에 차는 사람이 없다.”라면서도 정작 회원들 도움으로 호구지책을 삼은 이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까지를 끌어안고 도도한 강물처럼 30여 년이 지나갔다.  

  세상은 과거에 비해 많이 편해졌다. 빠르고 편한 길을 내느라고 한벽루 앞에 콘크리트 다리를 놨고 그렇게 한벽루를 무식하게 망가뜨려놓고도 전주의 명소라고 문화 책자에 버젓이 적어놓기까지 했다. 멀쩡한 산천을 허물고 거기에 고층 아파트를 세우기에 한창이고 논밭 옆으로 산자락 밑으로 기어기어간 인간적 길을 지우다 못해 산을 뚫어 터널을 냈다. 24시간 술을 먹을 수 있는 곳도 24시간 돈을 빌려주는 곳도 눈에 띄게 많다. KTX는 서울과 익산을 1시간 20분 만에 주파한다. 과거에 비하면 말도 못하게 편해진 세상이다.

  이런 문명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졌는지도 모를 빠른 변화가 불안하기 짝이 없을 때가 많다. 엄경희가 “위장된 편리함과 편안함에 자신을 내어준 자가 치러야 할 대가는 자유의 박탈이다.”(『시인동네』, 2018년 9월호)라고 말한 대목에 눈길이 꽂힌다. 문명은, 문명과 거리를 두고 살고 싶은 자유마저 문명적 가해자들의 욕망 속에 가둬버렸는지도 모른다. 경제가 발전하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경제가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발전된 경제에 맞춰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미치게 바빠질 수밖에 없다는 지점에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삶을, 사람답게 살고 싶은 그리움을, 그 순결함을 통째로 빼앗기는 중인지도 모른다.

  이게 현실이고 이 질곡이 전북 작가회의의 문학적 토양이자 자양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가 이미 구획해놓은 삶의 질서를 거절할 수 있다. 돈이 중심이 된 지금 세상에서 돈의 효용가치를 새삼스럽게 따지는 것 자체가 문학적 풍요로움을 가져올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렇다. 돈으로 획일화된 세상을 만들어놓고 이 길을 안 가는 이를 집단적으로 소외시키는 차갑고 메마른 자리에서 인류의 바른 희망이 싹틀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인가에 얽매인 노예가 아니므로 무한경쟁에 짠지가 되어버린 세계 질서를 거절할 수 있고 스스로, 기꺼이 소외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글을 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자신 생활 안팎을 부단히 성찰한다. 골방에 처박혀 머리를 싸맨다고 해서 좋은 글이 써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자유로워야 글이 잘 써지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차원 높게 성취된 시와 소설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작품들을 내면화하는 데 게으르지 않을 것이다. 오직 글을 통하여 “이 세계는 정말로 살 만한 세상인가”를 되짚어본 작품들이 한국작가 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깊이 음미할 것이다. 우리가 쓰는 글이 일기가 아닌 이상, 글은 당대에 할 말이 있기 때문에 쓰는 예술 행위인 이상 글은 타자화된 자신의 얘기일 수 있으며, 당대의 모순을 비껴가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30여 년 전 이병천 소설가가 “이젠 너희가 대답하라!”라고 일갈한 화두의 의미를 뼈저리게 통찰하면서 한 걸음씩 자신의 문학적 자리를 다져갈 것이다. 모두가 겪는 오늘이 왜 아름답지 않은지를 끊임없이 묻고 해석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그리워할 것이다. 우리의 이런 문학적 행보에 관심을 보이기는커녕 세계인에게 보편적으로 다가갈 문학적 고갱이가 무엇인지조차 눈곱만큼도 고민한 적이 없어 보이는- 미국이나 유럽의 버터 냄새를 묻히기에 안달 난 짝퉁 모더니스트들의 글줄이 우리의 입맛을 씁쓸하게 할지라도 통일이 왜 당대 최고의 과제인지를, 경제적 불평등이 어떤 잇속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사이버 세계에 빠진 헛발질을, 개인주의로 위장된 이기주의를 자신의 삶 정면에 놓고 끼니때 먹는 밥알처럼 꼭꼭 씹어 삼킬 것이다.

  또한 우리는 ‘나’의 존재감도 확인할 것이다. 사회 모순에 직면한 모두의 오늘을 힘껏 살아내면서 언어의 숨결을 은반지에 세공하듯 형상화해낼 것이다. 문학이 문화의 주변이 되었든 변두리가 되었든 우리는 ‘나’의 존재감 확인을 토대로 형상화 될 전북의 정서를 세계인의 보편적 정서에 녹아들 수 있도록 온 정성을 기울이는 작업에 망설임이 없으리라. 놀부가 흥부를 곳간 구석에 가둬놓고 몽둥이질 하듯 글은 쓸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나비는 몽둥이로 잡는 것이 아니라 나비채로 잡는다는 것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전북 작가회의의 미래의 문학 또한 자신의 존재감에 함몰된 관념적 세계나 3‧4조 내지 4·4조의 구호에 불과한 관념적 과격주의에도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 사회역사적인 ‘나’의 존재감을 쓰라리게 확인하면서 부조리한 현실을 피해가지 않는, 치열한 언어미학을 올곧게 세울 터이다.
                                                    -『작가의 눈』, 2019년 1월.

                                            

[2019-02-02 16:29:02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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