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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성장통5 버드랑죽-앞시암3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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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성장통> 5. 버드랑죽 - 앞시암3


3

  앞시암도 그럴 판이었다. 앞시암은 둥그런 샘이었다. 너비는 세 발 가옷을 웃돌았고 깊이도 그 못지않았는데 머리엔 양철지붕을 했다. 두레박이 굳이 필요 없는 샘이었고 샘가에 왕돌들을 박아 테처럼 둘렀다가 시멘트로 새 단장을 했는데 높이가 바닥에서 두어 뼘도 안 되었다.

  그러므로 바가지 즉 박적으로 물을 막 퍼먹을 수 있어서 앞시암을 박적시암이라고도 했다. 사람들은 샘 바닥에 염소 대갈통만 한 물구멍이 있어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철철철 넘쳐난다고 믿었다.

  울안에 샘을 판 집들도 이 물을 물지게로 길어먹다시피 했고 무더위가 밤까지 진을 치면 앞시암은 품을 열어 청년들의 알몸을 받아냈다. 땀띠도 이 물로 등목 한번하면 맥을 못 추었다.

  아줌마들은 여기서 빨래도 했다. 바가지로 물을 막 퍼서 쓸 수 있고 때도 잘 빠졌으니까. 밤이면 청년들 입담이 낮에는 빨래방망이질 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니 앞시암은 동네의 눈이었고 귀였고 입이었다.

  살쾡이에 목 달아나고 간 빼먹힌 씨암탉을 찾아내어 생기다 만 알까지 정히 갈무리하던 곳, 논밭 일에 지친 어른들이 하루 일을 내려놓고 얼굴을 씻던 곳. 앞산 밑자락에 붙었어도 물맛 좋기로 소문나서 택시기사들도 척척 알아들었고 우체부 아저씨가 자전거 받쳐 놓고 목을 축였다.

  이런 앞시암이, 동네의 젖줄이자 삶의 동력이었던 앞시암이 콘크리트더미에 묻힐 판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고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내 글줄은 앞시암의 처녀성을 훼손하려는 불순한 상상력에 막혀 휴지처럼 구겨졌다. 하지만 동네가 폐해지게 된 이유를 찾으라는 듯 앞시암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동네가 없어질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근친상간은 아닐 것이다, 딴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것이 뭘까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버드랑죽에 살았던 사람들의 몇은 산지기였다는 말도 얼핏 들었는데 그렇다면 그 산의 주인들은 어디에 사는 누구란 말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런 근거가 없으니 방죽밑이 앞방죽께에 있는 3, 400년 묵은 팽나무 두어 그루만 보고 동네의 역사를 추적해간다는 것은 무리였다.

  동네가 폐해진 이유 중 하나가, 선조 때 대동세상을 부르짖었던 정여립 선생 - 당시 전주에선 기축옥사己丑獄事와 관계된 지식인 천여 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했는데 그 떼죽음의 한 부분이 유제리 즉 버드랑죽일 수도 있었다. 나는 오랜 전부터 정여립 선생과 버드랑죽을 연관 지어 생각하곤 했다.

  동네 방죽 둑에 버드나무를 심고 오류선생을 흉내 낸 지식인들이 앞시암이 여자의 성기를 닮았다는 순 싸구려 풍수쟁이의 말에 유혹될 리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확한 증거와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 상상력 또한 입담 좋은 호사가의 허풍에 불과했다.

  황방산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버드랑죽은 흔적도 없었다. 누구네 집터인지 누구네 전답인지도 모르고 오죽잖게 공장 뼈대들이 올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흉물스런 저 뼈대들은 이 땅의 어르신들이 왜 살아 있는 박물관인지 그 의미조차 모를 것이었다.

  돈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행복해 질 것이라는 전제,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망상妄想이라는 것도 알 턱이 없었다. 내 눈앞에는 버드랑죽을 잡아먹고도 배고픈 문명이 사방 곳곳을 파헤치고 있었다.

  등 뒤의 전주시, 곳곳에 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 찬 천년고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주시 제3공단인가 정비공단을 짓는다면서 내 등하교길을 맞아주던 수백마지의 논밭을 싸그리 헐어버렸고 비석날, 신행리, 감천리 세 동네까지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스물세 살의 내가 버드랑죽을 꺼낸 이유는 단지 과거로 돌아가자는 복고적 취향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곱든 밉든 사람들 속에서 나는 커왔고 구질구질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사람냄새 땀냄새 그 속에서 커왔으므로 고향 사람들과의 동질감 속에서 내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었다.

  더구나 나는 우리의 현재가 잃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지 우리의 과거를 통해서 짚어보고 싶기도 했을 것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할수록 나만 더 왜소해지겠지만 그러함에도 나는, 우리의 미래는 바다 밖 강대국들에서 오는 게 아니라 우리의 불행했던 과거로부터 온다는 것을 그때도 믿고 있었을 터였다.

  앞시암이 궁금했다. 오죽잖은 건물들 속 어디가 앞시암 자리일지 눈대중을 했다. 근친상간이란 불쾌한 기억을 달고 있지만, 문명에 소외되다 못해 콘크리트에 묻혀버리고 말았지만 앞시암은 여전히 맑은 물, 솟아나는 물, 온도가 일정한 물로 동네사람들의 기억을 목축여줄 것이었다.

  이름도 빛깔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이력이며 노고가 역사책에 한 줄도 적히지 않았더라도 내 몸에 기록된 그분들의 삶과 버드랑죽은 언젠가는 역사가 되어 꿈틀거리지 않겠냐고 앞시암은 오래오래 내 기억에게도 젖을 물릴 것이었다.

  그럴 거라고, 앞시암 속에 간직된 여성성과 순결성을 내 정신이 흐려지기 전까지 존중하고 지키겠노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걸을 때마다 찰랑거리는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되똥되똥 집으로 돌아가는 미자 가시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녁햇살이 물동이 테두리에 맺혀 빛났다. 텃논을 지나 구판장 옆 골목으로 사라지는 가시내를, 가시내가 걸을 때마다 찰랑찰랑 반짝이는 저녁햇살을 앞시암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앞시암에 막혀서 버드랑죽 유제리는 몸뒤짐당하다 만 꼴이 되고 말았다. / <다음 편에 계속>




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020

[2019-02-01 14:10:13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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