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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성장통5 버드랑죽-앞시암1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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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성장통> 5. 버드랑죽 - 앞시암1

  황방산은 앞가슴을 열어 바루산과 앞산을 뱃구레에 바짝 붙이고 그 아래로 논과 밭을 내주어 사람들이 터를 잡도록 하였다.

  웃거티, 아랫거티, 건너물, 방죽미티, 네 촌락을 싸잡아서 70여 호가 넘는 동네를 이루었고 동네 이름을 유지柳池 즉 버드랑죽이라고 했으며 동네 초입에 샘을 파서 앞시암이라고 불렀다. 물 퍼먹는 바가지를 ‘박적’이라고도 했는데 박적으로도 물을 막 퍼먹을 수 있어서 앞시암을 박적시암이라고도 했다.

  예부터 이르기를 완산주(지금의 전주)엔 천 년 동네가 셋이 있으니 그 하나가 완주군 이서면 상림桑林이요, 둘째가 효자동 마전馬田이며, 셋째가 이곳 유지柳池니, 동네가 없어질라치면 유지, 즉 버드랑죽이 제일 먼저 없어질 것이라고들 하였다.

  이런 얘기를 언제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까먹었다. 어른들 술자리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온 얘기였을 것이니 귀동냥 삼으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귀에 들려왔을 터였다.

  스물세 살 때 나는 동네 얘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시내에서 삼례나 성덕 방면 버스를 타고 가다가 팔복동 발룡리에서 내려 꼬불꼬불 시오리. 하냥 걸어서 오갔던 길과 슬레이트 얹은 집들이며 논밭뙈기에 얽힌 얘기를, 내 몸에 적혔을 이웃들의 삶을 적고 싶었다. 행정구역상 전주시였지만 빈촌이었던 버드랑죽.

  해발 217미터에 불과한 황방산의 품이 좁아서인지 논밭뙈기가 변변치 않았다. 부자라고 해도 논밭 스무 마지기 안팎이었다. 계절과 관계없이 끼니때 양식 떨어지는 집이 많았고 겨울이면 콩나물밥 무밥 고구마밥을 매일 해먹다시피 했다.

  들판이 넓거나 숲이 깊거나 그럴 듯한 시냇물이 흐르거나 무슨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빈티가 더 났는지도 모르겠다. 1985년 당시 동네가 토지개발공사에 팔린다던가, 전주시 제3공단이란 이름으로 싸잡혀 작신 뭉개진다던가. 우리 모두는 실향민이 될 것이라는 얘기가 확실해지고 있었다.

  포클레인 삽날이 앞산을 까뭉개버렸고 동네가 함부로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동네의 눈이었고 입이었고 상상력이었던 앞시암도 무식한 포클레인 삽날에 묻히기 직전이었다. 가난했지만 정다웠던 이웃들의 체취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어째서 내 고향을 깡그리 뭉개버리느냐는 말도 못해보고 중장비들에 무참히 박살나는 동네를 바라보며 붓방아만 찧고 있을 뿐이었다. 돈과 기계와 개발주의를 한데 묶은 문명, 그 문명에 소외되다 못해 숨통이 끊어져가는 얘기를 무작정 써보고 싶은 수렁에 빠져 버렸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꺼내들 얘깃거리가 없었다. 어른들은 당신들 일상을 꺼내주기는커녕 논밭두렁에 얽힌 우스갯거리조차 말해 주지 않았다.

  왜 이 동네를 유지리라고도 하고 유제리라고도 하는가. 어째서 천 년 동네인가. 서른 칸이 넘었다는, 조촌면 면장을 지냈다는 박 씨네 집터는 어딘가. 황방산으로 나무하러 갔다가 갈퀴에 걸려나온 해골들 이야기, 똥물을 걸러먹은 이야기, 귀신 들려서 죽었다는 어떤 누나 이야기가 귓바퀴에 곰실거렸다.

  궁금증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하면 그 이면에 감춰진 어떤 사연이 튀어나올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감추면 감출수록 더 호기심을 자극하는,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말토막을 붙들고 여태 속 썩는 사연을 캐고 싶었다.

  그 얘기의 주인공이 노름꾼이든 바람난 아줌마든 경상도 쪽에서 숨어든 빨갱이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 분들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 온 분들의 걸림새 없는 말토막 속에서 종자씨앗처럼 뱉어지는,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올곧게 꿰찬 얘기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런 것 알아서 뭐에 쓰려고? 그것 얘기하면 술이 나오냐, 밥 나오냐? 이런 태도였다. 모두들 이사 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보상금을 받았으니 응당 동네를 떠나야 한다는 것 같았다.

  어디로 이사 갈 것인지를 정해 놓고 거기 가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요량하는 분들이니 내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가난했을지언정 버드랑죽 사람들이 거칠지는 않았다. 논밭 예닐곱 마지기를 채 못 짓는 빈농들이 태반이었어도 색다른 음식을 하면 이웃과 나눠먹을 줄 알았고 동네 애경사에 적극적이었다. 근대화, 도시화에 소외된 것이 뭔지조차 몰랐지만 어른들은 이 세상에 사람처럼 귀한 존재가 없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보상금이란 딱지는 하루아침에 동네 사람들을 냉냉하게 만들어버렸다. 헛바람 새는 말씨에 배어든 땀 냄새 같은, 더 이상 하얘질 가망이 없는 색깔을 간직한, 거름자리에서 팍 삭은 홍어맛 같은 얘깃거리를 나는 아무래도 못 찾을 것만 같았다.

  그 때 먼 데로 이사 간 줄로만 알았던 박 씨 어르신을 동곡리에서 뵈었다. 내 할아버지와 절친한 분이셨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를 굳이 밝힐 필요는 없었다.

  나는 어르신을 동네에 상喪이 나서 고인을 하관할 때에도 자주 뵈었다. 나침반같이 생긴 나경과 쇠추 달린 흰 실을 손에 쥐고 묏자리 잡아가는 모습을 여러 번 만났던 것이다. 어떤 일로 늙은이를 찾아왔느냐고 물으시기도 전에 동네 이름이 왜 ‘유제리’냐고 부터 여쭙고 드는 나를 어르신은 당황스러워 했다. 몸이 갈대처럼 야위었는데 말씀마저 입바람 속에 파묻히기 일쑤여서 말뜻을 정확히 헤아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동네에 관한 한 어떤 것도 모르는 게 없는 어르신이니, 동네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일의 선후를 따져 명쾌하게 일을 추스른 어르신이니 내 궁금증을 확 풀어낼 뭔가를 - 동네에 비밀스럽게 간직된, 철저하게 감춰진, 그러나 어른들 모두가 알고 있는 얘기를 꺼내줄 게 틀림없었다. / <다음 편에 계속>


이병초 시인  |  jbpost2014@hanmail.net

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935



[2019-01-29 21:38:41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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