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에 훼손당하지 않은 시(詩)의 영토
이봉명 시집『검은 문고리에 빛나는 시간』에 대하여
이병초(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1
시(詩)는 일상의 작은 숨소리를 펴 보이는 미학일까. 그 숨소리가 맑아질수록 시의 품은 넓어지는 걸까. 길 바깥으로 휘어진 풀잎이며 수숫대 울타리 위로 고개를 내민 오이순이며 고추잠자리의 투명한 날개, 여기에 돌배기의 눈물방울 같은 시어가 구슬구슬 맺힌다. 일상의 소소한 모습을 언어의 키로 까불러서 새 숨결을 틔우며 시의 고유성을 확장해가는 이봉명의 시 세계는 시원의 공간을 닮았다.
그의 시편들은 전북 무주군 적상산 자락에서 촉발되었다. 산에 둘러싸여 있는 구불구불한 논다랭이들이며 반 넘게 기울어진 집들이며 인적이 거의 없는 골목이 이봉명 시의 현주소인 셈이다. 하지만 그의 시편들은 산골이란 한정된 공간에 멈춰 있지 않다. 그의 시편들은 사람답게 살고 싶은 꿈의 회로를 복원하는 데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보다 더 귀한 존재가 없다는 것을 별빛 한 점이나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로 빚어내는 것이다.
이봉명 시인은 첫 시집 『꿀벌에 대한 명상』(책만드는집, 1997.)을 출간한 이후 『아주 오래된 내 마음속의 깨벌레』, 『지상의 빈 의자』, 『포내리 겨울』, 『지상을 날아가는 소리』, 『바람의 뿌리』, 『가풀막』, 『자작나무 숲에서』 등의 시집을 상재(上梓)했다.
나는 『바람의 뿌리』 발문에서 “시에 적힌 그의 시간은 논밭 일 하기 싫어서 꾀똥을 누거나 중앙의 지면을 얻기 위하여 소맷동냥하기에 바쁜 이들을 꾸짖는 것 같다. 어떤 출판사에서 시집을 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떤 시를 쓰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게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인 이가 이봉명 시인이다.”라고 썼다. 나는 이 생각을 물릴 이유가 없다. 시인의 품성이 그렇고 시편들의 격이 어그러짐이 없으므로 나는 그의 시편들에 대한 다채로운 이해를 구할지언정 생각을 번복하거나 수정할 생각이 없다.
2
시를 쓰는 행위는 시의 갱신임과 동시에 자신을 떠나는 여행이다. 시의 정점(頂點)에 닿는 이 언술에는 시인이 시 현실에 간섭함이 없고, 시(詩)가 시인들이나 독자 위에서 군림하려는 인상이 적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시의 정점은 시의 가장 높은 자리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이며 시의 또 다른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봉명의 시편들도 이 지점에 있어 보인다. 그는 첫시집 『꿀벌에 대한 명상』 이후 여덟 번째 시집인 『자작나무숲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시 질서를 보였는데 이번엔 그게 아니었다. 최근에 펴낸 『검은 문고리에 빛나는 시간』(작가, 2023. 12.)에 수록된 시편들은 예전과 확연히 달랐다. 시의 숨결이 뿜어내는 정서적 살뜰함은 변함없이 적상산 근처의 토박이 삶에서 촉수를 빛내지만, 말로 그치기 일쑤인 시의 갱신이 시편들에 활착된 것이다.
어머니의 흰 고무신 끄는 소리
나무 사이사이로 별빛 스며드는 낌새에
호롱불이 흔들리는 시간
바람이 눈발을 껴입을 모양이었다
은색 손톱 같은 초사흘 달은
전등 없는 마을 입구에 걸어 두었다
-「초사흘 달은」, 전문.
시의 갱신은 예측이 허용되지 않는 실험정신 또는 시의 형식이나 내용의 일탈만을 뜻하지 않는다. 호롱불이 흔들리는 모습을 “바람이 눈발을 껴입을 모양”으로 읽었고 손톱달을 “전등 없는 마을 입구에 걸어 두었다”라는 언술은 시의 갱신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과감한 생략을 통한 시의 내구력(耐久力)이 햇귀처럼 빛난다. 좋은 시는 늘 그렇듯 어려운 낱말도 없다. 옳고 그름, 선과 악, 있다와 없다 등등의 이분법적 사유에 닿지 않는- 자연의 질서에 감응한 갱신의 시편들은 「다시 여름밤」, 「소나기」, 「토하」, 「장마」, 「꼬창모 같다 하였다」, 「돌무더기 근처」 등에 형상화되었다.
모두가 4차 산업을 비껴갈 수 없을지라도 자본 또는 문명과 관계없이 엄연히 유지되는 삶의 공간이 있을까. 어른이 현존하고 모두가 서로 존중받으면서 생활하는 곳. 솔갱이 태운 냇내를 쐬며 밤이 깊어 가고 머루알 같은 당신의 눈망울 속에 들어가서 한 계절을 뒨정거려도 탈이 없는 곳. 이봉명의 시편들에는 한국적 삶의 원형질이 여실히 드러나는 이 공간이 확보되어 있다. 가난이나 불편이란 말을 신앙처럼 모시고 사는 것도 모자라서 가난, 불편이란 말을 앞세워 일반인의 삶을 기만하려는 발상은 아예 발도 못 붙인다.
시냇물 소리며 꽃과 나비를 퍼 올리듯 생생한 시의 두레박질 속에는 얽둑배기, 아장살이, 새웃국, 숯골 날망, 볕살, 뜨게부부, 움막, 허깨비, 썽그런 막걸리, 챙이, 부석짝, 부지깽이, 헝겊 심지, 간각, 데시근하다, 천둥지기, 꼬창모, 호락질, 복령망태기, 얼럭들녘, 삐딱밭, 살강, 들창, 볏술, 와그리, 뒷간귀신, 정지칼, 삽짝문 등의 숨소리들이 시의 촉수를 빛낸다. 시를 몸으로 먼저 쓰고 나서 붓을 들었을 시원의 공간엔 오래된 미래가 별처럼 반짝이는 것 같다. 이봉명의 시편들은 과거지향적이 아니라 명백하게 미래지향적이라는 듯 사라져가는 언어의 지표를 비끄러매는 이 공간엔 시행 앞뒤의 문맥을 의도적으로 왜곡함이 없고 텅 빈 기표에 불과한 휘발성 발언도 없다.
사는 건 마디를 접는 일이지
살갗이 주름 접으며
눈물 없이 잠들고
꼿꼿하게 머리 들었다가
가만히 고개 숙였던 그런 날
시간의 휘어진 마디를 곱게 접는지
너도 손을 떨었다
-「너도 손을 떨었다」, 전문.
시에 적힌 ‘마디’는 무얼 뜻하는 것일까. 자신이 가장 아끼는 사물일 수 있고 오랜 기간 포기하지 못한 꿈일 수도 있겠다. 세상에 사실로 인정된 사회 담론의 의미 가치를 폐기하자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접는’ 행위를 통하여 지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꿈꿀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여기에 시간이 끼어든다. 불순한 세력이 사회 전면에 내세웠던 시간. 불순한 세력의 잇속에 복무하는 시간. 하지만 이 시에 적힌 시간은 “휘어진 마디를 곱게 접”는 행위로 다가온다. 이때 “너도 손이 떨었다”라는 시구가 서늘하다. 지난날에 경의를 표하는 시의 화자와 독자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시는 여기까지이다. 삶이 더는 시간의 휘어진 마디가 되지 않기 위해서 어떤 꿈을 꿀 것인가는 독자의 몫이다.
3
사람다움의 품을 곡진하게 끌어내는 이봉명 시의 언어미학. 토박이말에 간직된 작은 숨소리며 일상의 동적(動的) 상황을 모국어의 눈금으로 걸러낸 갱신의 어법은 소외의 그늘을 말끔하게 지운다. 시는 별스러운 예술세계가 아니라 부박한 현실 논리에 훼손당하지 않은 언어의 영토라는 점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는 당신, 숫자로 획일화된 자본의 야만적 속성을 야물게 걷어찰 자유를 존중하는- 야성(野性)을 포기한 적 없는 당신. 사람답게 살고 싶은 꿈의 회로를 저버리지 않은 당신이 이봉명 시편들 속의 주인공이며 한국 시의 희망이다.
-『전라도닷컴』, 2024년 3월호. |
[2024-03-08 07:31:13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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