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마당에는 장미 네 그루가 있다. 담이 없기 때문에 담장을 타고 오르는 넝쿨장미가 아니라 키 작은 것으로 심어봤다. 귀동냥에 의하면 장미는 벌레들이 많이 꼬여서 키우기가 쉽지 않다고들 했다.
내 생각은 가시들에 찔릴 일이 더 아찔했다. 작은 것들은 수월하겠거니 던져만 놓아도 산다는 꽃집 주인의 말에 현혹되어 심어 놓기는 했다. 그런데 여직 제대로 된 꽃을 피운 적이 없다. 겨울 문턱이 내일 모레인데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장미들이 심심찮게 피어있는 것을 보면 의아할 따름이다.
바빠서 챙겨가지 못한 장미 서너 송이.
우리 집 장미는 오월 제철에도 피지 못했다. 하물며 이 계절에? 기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되레 꽃나무의 안위가 걱정된다.
지난 몇 주 전 글(11회)에서 나는 <그리운 보상마을 언니’s day>를 고대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었다. 얼마 전에 그 행사를 무사히 마쳤다. 최고 73세의 언니부터 최저 53세의 동생들까지 35명 가량이 모여 가을 어느 날을 보냈다.
윗녘 서울과 원주에서, 아랫녘 해남과 거제에서까지 먼 걸음들을 하셨다. 50여년, 30여년만의 공백을 대여섯 시간동안 메꾸기에는 시간이 짧았다. 행사장은 좁고 마이크도 없고 그야말로 아수라장 같았다. 호르몬의 변화를 겪었는가. 목소리들은 우렁찼고 열기는 찌를듯했다.
오래 쌓아두었던 숙제를 드디어 마쳤다는 생각에 홀가분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허퉁한 마음이 비집고 들어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후유증이 크더라는 얘기다. 시간의 상흔이 묻어나는 언니들대로 나이 들어가는 동생들대로 짠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가 가라앉기도 했다.
장미꽃을 들고 입장하는 언니들.
행사를 치른 다음날은 하루 종일 집안을 배회하며 보냈다. 내가 좀 그늘이 있는 사람이어서 그러려니 한다. 그렇다고 자주 무기력증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타고난 유전자의 힘으로 일어서기도 잘 하는 편이어서 지금은 거의 정돈되었다.
문득문득 떠오른다. 연신 눈물을 닦아내던 ‘양숙’ 언니를. 내가 낭독한 글 중 “애썼다. 애썼다. 사느라고 고생 많았다.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자글자글해진 얼굴과 손을 부벼 주고 어깨를 두들겨 주게 될 것이다” 이 부분 즈음이었을 것이다. 가만가만 눈물을 훔치는 그녀가 눈에 띄었다.
이까짓 말이 무엇이라고 수고하고 곤고했던 인생들을 토닥여 주지 않았는가. 여직 만남을 미루어왔는가. 그 글 읽기를 마친 나는 그녀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함께 울었다. 그렇다. 제아무리 떠들썩해도 들을 사람은 듣는다. 그녀의 어린 날들이 위로받았으면 된 거다.
‘경자’였던가, ‘경순’이었던가. 가난해서 학교에 가지 못한 그녀 - 지긋지긋한 동네를 벗어나 돈을 벌고 성공하겠다고 떠났던 – 가 울먹인다. 그녀는 지금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손주까지 데리고 나타났다. 그녀의 당당한 위용이 자랑스러웠다.
언니‘s day의 고참 언니들.
젊었을 때의 퍼뜩이던 순발력이 사그라지고 있음을 이번에 실감했다. 그 틈새를 사랑하는 후배들이 메꿨다. 외부의 협찬(특히 남자들)을 거절하고 십시일반 준비위원들의 찬조와 참가자 회비 2만원으로 소박하지만 풍성한 자리를 만들어보고자 했다. 선물은 준비했지만 꽃을 나눌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녀들이 사온 장미 한 송이.
수십 년 만에 고향의 집터를 밟았다는 ‘남순’ 언니가 지금은 사료가게가 된 그 앞에서 환한 얼굴로 사진을 찍는다. 비포장길 신작로 가상에서 살았던 ‘복덕’ 언니는 공터로 변한 집터를 보며 사진 찍기를 거부했다. 진저리가 난단다. 버스나 트럭이 달릴 때마다 마루와 밥상 위로 달려들던 흙먼지 구더기가 떠오른다고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누구도 빠지지 않고 기억하는 놀이터 - 한디(한데: 사방과 하늘을 지붕이나 벽 따위로 가리지 않은 자리)마당 - 가 이렇듯 좁은 땅이었느냐고 입을 모았다. 거기 담장에 시절도 모르고 핀 장미 앞에서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순절리 앞산도 바로 코앞이고 냇가도 폭이 좁아졌다고 아쉬워했다.
고향 마을 표지석 앞에서...
오랜 기간 남편으로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미국 여성 ‘폴레트 켈리’는 또 다른 피해 여성들을 위해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라는 시를 썼다. 가슴이 베일 듯 아픈 내용이다. 그녀는 용기 내어 탈출해서 본인과 같은 처지의 여성을 도우며 살았다.
우리네 언니들도 살아남았다. 온갖 폭력과 고통 속에서도 가난이라는 폭거와 건강의 무력 앞에서 무사했다. 그래서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꽃을 나누는 언니들이 되었다.
우리 집 뒷마당의 국화는 몸이 약하다. 내가 한쪽으로 쓰러진 고개를 반대편으로 들어 올릴라치면 툭툭 끊어진다. 그렇게 꺾인 국화를 화병에 담아 거실에 놓았었다. 그때는 개화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지만 햇살과 바람이 부족한 실내에서도 끝끝내 만개했다.
이것도 나는 재미졌다. 그러나 이제 그 국화는 똥친 막대기가 되었다. 들여다보는 횟수가 현저하게 줄었다. 지금은 장미꽃이 나에게 미소를 선사한다. <언니‘s day>가 만든 진풍경이다.
사랑하는 나의 후배들이 본인들 동네언니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느라고 애쓴, 아프지 않고 견뎌낸 세상의 수많은 언니들에게 안겨 준 장미꽃 덕분이다. 우리들은 언니라는 이름으로 외롭지 않게 되었다. / 이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