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사색] 건망증1
중앙선데이 입력 2024.12.07 00:01 업데이트 2024.12.07 07:47
건망증1
정양
창문을 닫았던가
출입문은 잠그고 나왔던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자꾸만 미심쩍다
다시 올라가 보면 번번이
잘 닫고 잠가놓은 것을
퇴근길 괜한 헛걸음이 벌써
한두번이 아니다
오늘도 미심쩍은 계단을
그냥 내려왔다 누구는
마스크를 쓴 채로 깜박 잊고
가래침도 뱉는다지만 나는
그런 축에 낄 위인도 못된다
아마 잘 닫고 잘 잠갔을 것이다
혼자 남은 주막에서
술값을 치르다가 다시 미심쩍다
창문을 닫은 기억이 없다
출입문 잠근 기억이 전혀 없다
전기코드도 꽂아둔 채로
그냥 나온 것만 같다
다들 가고 없지만 누구와도
헤어진 기억이 없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보통 일이냐
매일같이 닫고 잠그고 뽑는 것이
보통 일이냐, 그래, 보통 일이다
헤어진 기억도 없이
보고 싶은 사람 오래오래
못 만나는 것도 보통 일이다
망할 것들이 여간해서 안 망하는 것쯤은
못된 짓 못된 짓 끝도 없는 것쯤은
열어놓고 꽂아놓고 사는 것쯤은
얼마든지 보통 일이다
닫고잠그고가고보고싶고
다 보통 일이다 술기운만 믿고
그냥 집으로 간다 집에서도 다시
닫고잠그고뽑고열고마시고끄고그리고
깜박깜박 그대 보고 싶다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창비 1997)
보통이라는 말은 부정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그렇다고 근거 없는 긍정의 허공으로도 튀어 오르지도 않습니다. 평탄한 땅에 두 다리를 딛고 안정된 자세로 굳게 서 있는 듯합니다. 저는 보통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뛰어나지는 않지만 열등하지 않고 흔히 있는 평범함이지만 그렇다고 가치 없는 것은 아닌. 조금 다른 활용이겠으나 국밥집이나 중국요릿집 메뉴판에 종종 보통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것도 마음에 듭니다. 특이나 곱배기가 아닌 보통의 힘만으로도 이내 따뜻하고 푸근해지는 것이니까요. 보통의 사람들이 보통의 생각으로 보통의 삶을 이어나가는, 이토록 거룩한 보통의 힘.
박준 시인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7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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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0 21:50:39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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