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옥씨네 마당> 19회. 경계 없이 살아보고자 했으나...- 이현옥
승인 2025.01.17 20:05:49
19회. 경계 없이 살아보고자 했으나...
내겐 시내에다 땅값을 지불할 돈이 없었다. 현재 살고 있는 소읍에 집을 짓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구입한 땅은 생각보다 넓었다. 울타리는 치지 않기로 마음을 정해 놓았다. 벽돌로 집을 두르는 것은 답답하고 연녹색 철망을 두르자니 너무 튈 것 같기 때문이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있는 듯 없는 듯 경계 없이 살자. 그래도 표식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나무를 주욱 심기로 작정했다. 이것저것 말고 단순하게 한 종류로 가보자고 밑그림을 그렸다.
집이 완성되기 전 울타리용 나무를 찾아서 여기저기 발품을 팔았다. ‘에메랄드 그린’과 ‘문그로우’가 맘에 들었다. 사철나무나 탱자나무, 화살나무 등을 심으면 좋겠다고 거드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내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2년전 뒷마당(사진 위)과 최근 모습.
암암리에 유럽구경을 해 본 가락을 흉내 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리라. 특히 그들 나무는 반 고흐의 그림에 가끔 등장했던 사이프러스와 흡사하게 보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심었다는 사이프러스,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과 그 근처를 지날 때 차창 밖, 그 나무들 뒤에는 묘지들이 언뜻언뜻 보였다. 아직 나는 죽음을 얘기하기에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며가며 찍어놓았던 어린 에메랄드 그린과 문그로우까지 40여 그루를 한 농장에서 구입하여 2년 전 3월 말경에 심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동쪽은 제외했다. 장차 덩치가 불어날 것을 예상하고 간격을 넉넉히 두었다.
우리집 동쪽과 서쪽의 구성원들은 내게 불편하다. 일단 동쪽에는 남북으로 길쭉한 밭이 있고 그 옆에 슬라브 집이 있다. 그곳에는 이상한 남자가 산다.
내가 파악한 바로, 나이는 얼추 오십 중반쯤 되어 보이고, 혼인은 하지 않았다. 가끔? 주기적으로? 옥상이나 계단, 마당 등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욕설을 퍼붓는다. 분노에 찬 목소리가 얼마나 큰 지, 길 건너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것도 같다.
가끔 나는 우리 집 동쪽으로 난 작은 창문 틈으로 내다볼 때가 있다. 여러 날 그 남자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일장 쏟아내는 혼잣말을 엿듣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지금은 그가 무슨 일들과 화를 품고 있는 대상까지 대충 파악했다. 조현병에 걸렸다고들 수군거리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문밖을 거의 나오지 않고 사람을 헤치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내가 주차장에 갈 때나 마당에서 식물들을 돌보는 동안 수상한 눈빛이 느껴질 때, 마주칠 때 기분이 여간 나쁜 게 아니다. 어서 저 시선을 차단해야만 했다.
최근 뒷마당(사진 위)과 서쪽 앞마당(사진 아래 왼쪽이 문그로우, 맨 오른쪽이 에메랄드 그린)
서쪽에는 불편한 시선들이 여럿 있다. 인력사무소에 오가는 남자들이 그들이다. 차라리 우리말을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참을 만하다. 그들은 새벽에 모였다가 일감이 주어지면 금방 흩어진다. 이중 언어를 구사하는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문제다.
이 남자는 노동현장에 가지 않고 외국인들에게 일감을 중개하는 사람 같다. 추운 겨울만 빼고, 두어 시간을 밖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앉아있을 때가 많다. 정면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걸리적거리는 눈빛을 가려보자고 에메랄드 그린 사이사이로 남천을 더 심었다.
그들이 나에게 말을 건네거나 해코지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거나, 돌리지 않거나 간에 그들이 어른거리는 느낌은 기분 나쁘다. 하지만 어쩌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살 수는 없는 게 삶이니.
나무들로 꼼꼼히 가린다고 해서 울안으로 넘나드는 목소리들과 시선들을 가릴 수 있을까만, 그러니 에메랄드 그린이여, 어서 자라다오. 내 마음의 반경이 무럭무럭 넓어질 수 있도록 도와다오. / 이현옥
글쓴이 / 이현옥 전 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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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1 22:45:14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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