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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옥 타박타박9. 버스를 처음 탔던 날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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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버스를 처음 탔던 날 <이현옥의 타박타박>



언제 어디로 가는 버스를 처음으로 탔는지 나는 정확히 기억하질 못한다. 어머니의 강보에 둘둘 싸여서 탔거나 포대기를 댄 등에 업혀서 탔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할 것이다.

가족들 모두 서울 서대문구에서 몇 년 동안 살다가 내가 세 살 되던 해에 봉동으로 이사를 왔다고 하니 그 때 타보지 않았을까 싶다. 아, 아니다. 이삿짐 트럭을 타고 왔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비행기나, 자가용을 타고 내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살림이 넉넉한 형편이 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전라북도에는 공항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어찌되었건 세 살 적 일들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므로 그때의 일은 제쳐두기로 하자. 그것을 확인해 줄 만한 몇몇 가족은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으니.


여름이었고 해가 지기 전이었다. 그때는 토요일을 반공일이라고 불렀다. 작은 오빠와 나는 전주로 가는 시내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양쪽 손에는 푸성귀와 참외 몇 알이 묶인 보따리가 들려 있었고, 나는 이제나 저제나 버스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아침나절이었다면 정류장에 다른 일행들도 보였을 것이다. 지금은 저녁 거름이고 시내에 나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는 외삼촌댁에서 하룻밤 묵고 내일 돌아올 예정이다. 난생 처음 타 보는 버스에 대한 기대로 내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언제쯤 버스가 모퉁이를 돌아 나올지 낌새를 살피느라 내 모가지는 뺐다가 들여놓았다가 바쁘기 짝이 없었다.

저 멀리 큰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모습이 보이면 분명히 버스일 것이다. 한껏 부푼 내 속을 들여다봤는지 오빠는 머퉁이를 줬다. 차멀미 때문에 엄청나게 고생할 것이므로 방정 떨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었다.

신작로 양쪽 가장자리에 일렬로 늘어선 포플러 나무 잎사귀들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축축 처져 있다. 정류장 건너편 내 친구 복주네 집 지붕도 무겁게 내려앉았다. 내 목도 금세 자라목처럼 오그라들었다.

한 손으로는 의자를 다른 손으로는 버스 천정에 달려 있는 손잡이를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넘어지지 않으려 나는 안간힘을 썼다.

그것도 잠시 마그네다리를 건너자마자 내 속은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폭이 좁고 포장되지 않은 신작로는 움푹진푹했으며 반대쪽 차들을 비키느라 거의 곡예를 하듯이 달렸기 때문이다. 정류장에서 차가 설 때마다 버스 뒤쪽으로 휘날리던 흙먼지는 앞쪽으로 몰려갔다가 열린 차창으로 훅 들어와 내 얼굴에 쏟아 부었다.

여기저기 창가에 붙어있던 사람들은 차가 서기 전에 얼른 창을 닫았다. 안내양이 “오라이 오라이” 소리를 치고 나면 다시 열었다. 오빠는 창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나를 배려하느라고 애를 썼다. 그는 두어 번 버스를 타본 듯 했다.

초포다리를 지나고부터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기사가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울렁거리던 내 속은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메슥거렸다.

창백해진 내 얼굴을 봤는지 오빠가 건강(말린 생강) 한 쪽을 내밀었다. 씹어 삼키지 말고 입에 물고 있으란다. 숨도 가급적 참으란다. 차가 멈추었다가 출발한 후 창문으로 들어오는 맑은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라고 했다. 순간이나마 메슥거리던 속이 가라앉기도 했다.

가만 보니 오빠의 얼굴색도 장난이 아니었다. 더 가관인 것은 그때 내 눈에 착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흔들리고 뛰는 몸을 중심을 잡고 서 있는데 차창 밖 포플러 나무들이 가만히 서 있는 나를 향해 확확 달려들더라는 말씀이다.

나무가 움직이는 듯, 내가 달리고 있는 듯, 그렇지 않아도 차멀미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이 느낌을 대체 어째야 옳을지 나는 눈알을 부라렸다가 시선을 딴 데 두기도 했다. 어느 순간 정상으로 돌아왔다가 또 다시 반복되었다.

드디어 신작로가 끝나고 포장도로가 나타났다. 오빠가 시내에 들어왔으니 차츰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한 명씩 내리기 시작하자 우리에게도 앉을 기회가 생겼다. 한결 좋아졌다.

앞쪽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내리고 나면 오빠는 나한테 옮겨 앉으라고 눈짓을 보냈다. 내 입속에는 매콤하고 향긋한 냄새가 죄다 빠져버린 불어터진 생강이 그때까지 재갈 물려 있었다.

한참을 달리고 난 후에야 우리들은 효자동 삼촌댁 근처에서 내렸다. 시내 번화가와는 달리 큰 건물도 많이 없었고 불빛은 드문드문 보였다. 언덕배기를 오르는 동안 개구리들은 우리 집에서 듣는 것마냥 목청이 사나웠다.

양옥집들의 개들도 우리가 이방인인 줄 아는 지 연신 짖어댔다. 가까스로 외삼촌댁을 찾아 들어갔을 때 삼촌 부부는 우리를 대견해하며 반겨주었다. 비록 방 2칸짜리 셋방살이였지만 방바닥도 마루도 반들반들하였다. 그들 부부는 자식들을 단촐하게 둘밖에 두지 않았는데 얼굴이 무척 하얗고 예뻤다.

내가 봐 온 네다섯 살 먹은 애들 중 그렇듯 부티나는 얼굴은 처음이었다. 삼촌 부부는 우리에게 시원한 수박과 과자를 내놓으며 극진히 대접해 줬다. 본인의 자식들도 귀하게 여기는 모습이 역력했다.

다음 날 아침밥상에 돼지불고기와 갈치구이, 기름에 볶은 가지나물이 올라왔다. 맛이 정말 좋았다. 배고플 때마다 생가지를 따먹고 입 가장자리가 허물던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뜸 들이는 동안 밥 위에 올려 찐 후 파, 마늘 양념하여 무쳐 먹던 나물과도 달랐다. 밥상머리에서 나는 친구들에게 버스 탄 얘기며 정성이 깃든 밥상에 대하여 조잘댈 것을 생각하면서 히쭉히쭉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나이 들어 알게 된 사실 - 그분과 우리는 삼촌간이 아니라 오촌지간이었다. 외할아버지에게는 3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삼촌은 우리 어머니께 “누님”이라고 정감 있게 부르며 꽤 먼 우리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니까 그 분은 어머니와는 사촌, 나에게는 오촌 외당숙이었던 것이다.

사람 참 좋던 외삼촌도 이제 돌아가셨다. 살아계신 한 분께 나는 여전히 외숙모라고 부른다.


/ 이현옥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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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728





[2021-07-09 14:50:29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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