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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시암의 미학-이병초(전북일보)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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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시암의 미학
  

                                    이병초(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소통이라는 말이 갈수록 낯설다. 더불어 살자는 뜻으로 읽히는 소통 옆에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따라붙기 때문일 것이다. 나라에 대흉년이 들었거나 전쟁 등으로 모두의 삶이 절박할 때 이를 극복하자는 데서 유래된 각자도생이 어째서 저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신고립주의적 탐욕을 빗댄 말로 둔갑해버렸는지. 인간성 회복이 목적일 소통의 뜻을 곰곰이 짚어볼 때면 문득 앞시암이 떠오르곤 했다.

샘을 ‘시암’이라고 불렀던 전주시 팔복동 3가 유제리. 일명 버드랑죽이었던 동네 초입에 앞시암이 있었다. 너비는 세 발 가옷을 웃돌았고 깊이는 그보다 더 깊어 보였는데 머리엔 양철지붕을 했다. 두레박이 필요 없는 샘, 왕돌을 테처럼 둘렀던 샘가를 시멘트로 동그랗게 단장했는데 높이가 바닥에서 두어 뼘도 안 되었다. 바가지를 ‘박적’이라고도 했으므로, 박적으로 물을 막 퍼먹을 수 있으므로 앞시암을 박적시암이라고도 불렀다.

사람들은 샘 바닥에 염소 대갈통만 한 물구멍이 있어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철철 넘쳐난다고 믿었다. 정말로 사시사철 물이 철철철 넘쳤다. 울안에 샘을 판 집들도 이 물을 자주 길어먹었고 무더위가 진을 치는 한여름 밤이면 청년들이 몰래 물을 끼얹었다. 아줌마들은 여기서 빨래도 했다. 바가지로 물을 막 퍼서 쓸 수 있고 때도 잘 빠졌으니 조선 천지에 이보다 더 좋은 공동빨래터는 없을 것이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밤이면 청년들 입담이 낮에는 빨래방망이질 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므로 앞시암은 동네의 눈이었고 귀였고 입이었다. 살쾡이에 간 빼먹힌 씨암탉을 찾아내어 생기다 만 알까지 정히 갈무리하던 곳. 논밭 일에 지친 어른들이 하루 일을 내려놓고 얼굴을 씻던 곳. 누구네 집에 초상이 나면 물지게가 부산했다. 고인을 모신 꽃상여가 노제를 끝내고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정원 대보름이면 샘 주위를 돌며 풍장을 치던 곳. 물맛 좋기로 소문나서 택시기사들도 척척 알아들었고 우체부 아저씨가 자전거 받쳐 놓고 목을 축이던 곳.

앞시암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다. 어른이든 아이든 엿장수든 머슴이든 자신을 찾는 이에게 물을 주었고 사람들은 앞시암에서 정다웠다. 소통이란 말이 안 쓰였어도 서로를 아끼고 존중했다. 그러나 1985년, 포클레인을 앞세운 중장비들이 앞산을 파헤쳐버렸고 동네가 까뭉개지기 시작했다. 토지개발공사에 팔렸다던가, 전주시 제2공단에 싸잡혔다던가. 나눔과 베풂의 산실인 앞시암도 콘크리트에 묻혔다.

황방산 꼭대기에서 바라보니 유제리는 흔적도 없다. 누구네 집터인지 누구네 전답인지도 모르고 공장이 즐비할 뿐이다. 경제 성장이 뭔지 개발이 뭔지 나는 잘 모른다. 사람들이 살던 동네를 무덤 속같이 파헤친 뒤 거기에 공장을 들여놓은 행위가 자본과 문명의 몫인지 죄악인지를 따져볼 능력이 내게는 없다. 앞시암이 궁금하다. 그러나 오죽잖은 건물들을 눈알 빠지게 둘러봐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앞시암은 있을 것이다. 땅속 제자리에서 맑은 물, 솟아나는 물, 온도가 일정한 물로 유제리 사람들의 기억을 철철철 넘치게 하리라. 이름도 빛깔도 없이 살아온 분들의 노고가 이 땅의 앞시암이었음을 깨쳐 주리라. 경제학을 이재학(理財學)으로 패대기친 각자도생을 거절함은 물론- 의(義)를 따르는 척하다가도 결국 제 잇속에 동료들을 이용해먹는, 자본가의 이윤창출에 소용될 가짜 ‘소통’의 친자식들을 앞시암은 철철철 지우고 있으리라. /이병초(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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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3 14:16:08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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