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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맑은시비평49. 이성복 -그 날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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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맑은 시비평'> 49. 그 날 - 이성복


그 날

세상은 언제부턴가 주파수가 망가졌는지도 모른다. 인내(忍耐)는 쓰기만 할 뿐이고 뿌린 대로 거둔다는 문구는 너무 낡았다. 일상이라는 말은 친근하지만 거기에 똬리 튼 삶의 행위들은 타자화되어 무감각하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을 품었던 주파수는 언제나 제자리를 찾을지, 그런 날이 오기는 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 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그 날」, 전문.





  일상에서 돌연 벗어난 시의 현실이 당혹스럽다. 시의 진술과 다르게 ‘나’의 눈에 비친 ‘前方’은 아직도 총구가 동족의 가슴을 겨누고 있고, “세상은 완벽”한 게 아니라 부익부 빈익빈을 가시화하는 획일화 양상을 띠고 있다. 시의 도입부에 제시된 반어는 보편적이지 못한 일상에 조소적 색깔을 묻혀둔 셈이다.  

  시상을 일관되게 끌어가기보다 삶의 이질적인 토막들을 연쇄적으로 몰고 가는 이 시는 속도와 우연으로 연속되는 사회와 많이 닮았다. 필연을 가장한 우연은 역전에 대낮부터 창녀가 서성거린다는 피폐함을 못 건너뛰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이라는 시구에 이르자마자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보다도 마음이 더 참담해진다.  

  일상의 관찰자인 ‘나’는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 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보았다. 주파수를 잃고 직직거리는, 어디에도 희망이 닿지 않는 사람들의 절망을 본 것이다. 그러나 타성에 젖었다는 게 뭔지도 모르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빌 뿐이다.

    

  시의 현실은 부조리하다. 시가 삶에서 파생되었을지라도 시 속의 현실은 상상의 세계다. 문제는 詩가 현실을 응시하도록 유도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역설은 캄캄한 불감증에 그치지 않는다. 1980년에 발표된「그 날」이, 시에 무려 아홉 번이나 반복된 ‘그 날’이 2020년 9월- 오늘을 돌아보게 한다.  /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411















[2020-09-07 20:33:08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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