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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맑은시비평39. 김용택-섬진강11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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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맑은 시비평'> 39. 섬진강11 - 김용택



섬진강11
  

  형님. 새벽어둠이 방충망을 빠져나가다가 아귀 안 맞는 문짝 귀퉁이에 걸려 나방처럼 파닥입니다. 참새들이 목 이슬을 터는지 제 머리맡이 소란스럽습니다.

  1982년 부정기 무크지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발표된 시편들로부터 『섬진강』, 『맑은 날』에 도달한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형님의 시편들은 토박이 정서에 머물지 않고 농경문화의 안팎을 감쌌습니다. 평생 뙤악볕에 그을려 얼굴이 더 이상 하얘질 가망이 없는 농사꾼들의 삶이 현대시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시편들은 한국시의 외연을 맘껏 확장한 자부심이었고 자존감이었습니다.  



당신, 당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곱게 지켜

곱게 바치는 땅의 순결,

그 설레는 가슴

보드라운 떨림으로

쓰러지며 껴안을,

내 몸 처음 열어

골고루 적셔 채워줄 당신.

혁명의 아침같이

산굽이 돌아오며

아침 여는 저 물굽이같이

부드러운 힘으로 굽이치며

잠든 세상을 깨우는

먼동 트는 새벽빛

그 서늘한 물빛 고운 물살로

유유히,

당신, 당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김용택, 「섬진강11」, 전문.

    


   형님. 땅의 순결을 간직한 ‘당신’이 섬진강 물길만을 뜻하지는 않을 터입니다. 저는 당신을 ‘가락’으로 읽습니다. 3·4조 내지 4·4조 연속체로 가락을 확보했던 과거의 시가(詩歌)에서 벗어나 불규칙한 단어 배열과 불규칙한 행갈이를 통해 확보되는 시의 유연한 가락이 시행 마디마디에서 당신을 끌어냅니다.

  산굽이 돌아오며 아침을 여는 물결처럼 “먼동 트는 새벽빛/ 그 서늘한 물빛” 곱디고운 물살로 당신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물굽이마다 햇살에 반짝일 시의 가락이 당신의 손길처럼 따뜻합니다. 아름답다, 예쁘다는 말의 의미는 몸에 가까운 것들을 골고루 아낄 줄 아는 당신의 마음결이라고 시의 가락은 설렙니다.

  캄캄한 불감증을 나무라듯 “잠든 세상을 깨우는” 당신이 문득 서럽습니다. 풀 비린내 묻은 바짓가랑이를 털며 “저 물굽이같이/ 부드러운 힘으로” 다가올 당신은 데면데면해진 모두의 오늘을 돌아보게 합니다. 송홧가루 묻은 눈썹을 닦으며 두릅과 취를 내미는, 자신을 곧게 지키는 산천의 순결이 돈과 문명에 소외된 것은 아닐까를 살펴보게 합니다.  

  형님. 새벽어둠은 아귀 안 맞아 짜그라진 문짝 귀퉁이를 벗어났습니다. 이른 아침인데도 앞산에서 뻐꾹새가 목 가래톳을 세우고 바람이 귀를 엽니다. 가난해도 걸림새 없는 산천의 가락을 타고 ‘당신’이 어서 오면 좋겠습니다.  /  이병초 시인(웅지세무대 교수)
  






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588














[2020-06-30 09:29:23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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