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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맑은시비평33. 오월, 무덥던 날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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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맑은 시비평'> 33. 오월, 무덥던 날


  그날, 1980년 5월 27일 새벽- 시민군을 떼죽음으로 내몰 계엄군의 진압작전을 예감한 윤상원은 전남도청에 남은 어린 학생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자로 만들 것이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말은 시가 아니다. 그러나 윤상원의 말을 글줄로 읽은 사람들은 이보다 더 절박한 시적 상황을 만난 적이 없다고 느꼈다. 그 뒤 2007년, 한 여고생의 시를 읽고 사람들은 또 한번 말을 잃었다.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 것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 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 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재.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정민경, 「그날」, 전문.



  시의 정황이 급박하다. 사람보다 총구가 먼저 보이는 상황은 전시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다. 화자의 자전거 짐칸에 웬 어린놈이 다짜고짜 올라타서는 어른더러 어서 가자고 보채던, 그 어린놈을 총구멍이 데리고 간 시적 긴장은 팽팽하다.

  전라도 입말이 시행에 쩍쩍 들어붙는다. 인물과 사건, 배경을 갖춘 서사는 총구 앞에 선 역사적 사실과 시적 진실을 물고 ‘그날’을 전라도 말로 재생한다. 계엄군 앞에서 입이 안 떨어졌지만, 자신을 사촌 형님이라고 둘러대는 어린놈 말이 사실이 아님을 밝힌 순간 주인공은 어린놈을 계엄군에게 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총구를 벗어나 자전거를 정말로 ‘허벌나게’ 몰았을 주인공은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교복을 입고 있는 어린놈을 본다. 총구 앞에서 엉겁결에 둘러댄 언행이, 살고 싶은 욕망에 충실했던 제 목숨이 버거웠을까.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멀리하고 어린놈의 환청을 듣는 주인공, 목이 다 쇠어 어서 가자고 보채던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으로 맺어지는 시상은 ‘그라고’라는 전라도 입말에 생생히 재생된다,

  5월, 무덥던 날- 계엄군은 왜 광주 시민들을 학살했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이들은 트럭에 실려 어디로 갔던가. 망월동은 오늘도 어린놈의 뒤가 궁금해서 ‘그라고’ 꽃들을 한꺼번에 피우는가.

덧글: 작품 게재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그날」의 저자 정민경 선생님의 연락처를 제가 모릅니다. 혹시 아시는 분이 있으면 <전북포스트 편집실>로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병초 드림.

/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출처: 전북포스트 http://m.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975




[2020-05-18 17:31:52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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