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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전홍준 시집 『눈길』
작성자 : 이병초 



슬픔을 긁어낸 자리에 서린 恨
                                                -전홍준 시집 『눈길』을 읽고

이병초(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1

  지난 8월 첫시집을 낸 뒤에도 전홍준 시인의 시편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내는 과정을 안온하게 보여준다. 기술 문명, 노동 소외, 비규범성, 인공조명, 추의 미학 등의 사회모순을 받아들인 현대시는 언제부턴가 유령의 출몰을 늘려가고 있다. 4차 산업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듯 시는 이제 감정의 피난처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낯설지 않다. 그런데도 전홍준의 시는 문명의 칩에 구애받음 없이 사람의 체취를 오롯이 담아내는데 주력한다.


어머니가 준비한 떡 반죽을 앞에 놓고
온 가족이 모여앉아
술술 지나온 물살을 풀어놓았었네
둘째 동생이 떠난 후 우리는
그 송편 빚기를 그만두었네
고향 가는 길 대신
길 막히는 김포와 강화대교 앞에서
송편 대신 호두과자를 파는
막냇동생을 만나러 가네
추석 앞두고 안부 문자와 카톡이 들어오고
나는 예전에 찍어 둔 어머니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 버무렸던 송편 사진을 보냈네
반달 같은 송편을 오래도록 도톰하게 살찌우고 싶었네
세상일 반달만큼 남았을지라도
입꼬리 살짝 올려놓는 멋을 즐기고 싶었네
송편 대신 따뜻한 호두과자를 만드네
얼굴 맞대는 대신 분주한 보름달
저 혼자 떴다가 지네
                           -「추석 전」, 전문

  명절에 가족끼리 송편을 빚는 일은 가족공동체가 재현되는 흡족한 정서의 틀을 이룬다. 어머니가 “지나온 물살을” 술술 풀어놓는 얘기는 서로 혈육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세상살이가 모질지라도 다시 한 번 살아보겠다는 삶의 동력으로 작동되었을 터이다. 삶은 늘 예기치 않은 곳에서 의지력을 회복하곤 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화자와 그 가족들은 둘째 동생이 떠난 후 송편 빚기를 그만두고 호두과자를 만든다. 동생이 왜 떠났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의 부재는 가족에게 큰 상처였음을 호두과자가 암시한다. “반달 같은 송편을 오래도록 도톰하게 살찌우고 싶었”다는 화자의 소망은 호두과자에서 간절해지기 때문이다.
  전홍준의 시가 정보사회가 가진 병적 징후를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의 시는 이런 징후에서 오늘의 시를 읽거나 내일을 전망하지 않는다. 문명이 가진 양면성에서 벗어났을 때 문명의 이기성을 명쾌하게 바라볼 수 있으며 거기서 시가 싹튼다는 것을, 시의 불온성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었던 그의 신작시「반딧불」도 예외가 아니다.


2
  

  우리 일상은 동작의 연속성 속에 있다. 반복적으로 뭔가를 듣고 보고 느끼면서 하루를 산다. 이 평범한 사실은 동작 또는 행위의 연속성을 토대로 삶은 생활의 주기를 찾으며 삶이란 그 연속성을 통해 깊어지는 어떤 것이라는 깨침을 준다.
  전홍준의 첫시집『눈길』에 수록된 시편들도 이 행위의 연속성 속에서 촉발된다. 갯비린내와 김 농사와 조새질과 파도소리에 감기는 안면도. 섬의 특수한 환경에 간직된 비밀스러운 얘기나 신비로운 사실을 들려줄 법도 하지만 그의 시에 드러난 섬의 일상은 뭍의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화자는 늘 뭔가를 만져보거나 쓰다듬고, 입 다물고, 움츠리면서 섬사람들의 면면을 되짚어본다.
  시적 화자로 표면화된 섬사람들의 삶은 불편하고 서늘하다. 전홍준의 시에 녹아든 삶의 행위는 “뜨거움의 손 시림”(「겨울」)처럼 혹한의 겨울을 견딤과 동시에 한 개인의 생애도 역사일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어제와 똑같이 삶의 본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문명의 그늘에 가려진 인간의 삶은 되레 좁아졌다는 모순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그의 시는 사회역사적 담론에 소모적으로 부역당하지 않고 시의 우주적 상상력이라는 별 소득 없는 말에도 관계가 없다. 그의 시집『눈길』에 수록된 시편들 속에는 한 자연인이 견디어 온 시간의 내력이 단단하게 응축되어 있다.

물 빠진 바다가 우물 하나 파 놓았다
종일 조개를 파고 돌아올 때
몸에 묻은 뻘 물 밑에 가라앉히고
간 들인 몸도 함께 가라앉아
따로 물을 쓰지 않았다
씻고 빨고 닦아야 하는 것들을
사람들은 항상 이곳에 내맡기기도 했고
바다로 나갔다 삼동네 마을 아낙들이 겨울바람에 뒤집혀
줄초상 났을 때도 바다로 생을 번 신발이
이 둠벙 속으로 떠밀려 와서
몸 대신 가라앉기도 했다
                                -「둠벙」, 전문


  섬사람들이 종일 조개를 캐고 집에 돌아가면서 몸과 도구를 씻는 곳이 둠벙이다. 화자는 둠벙 물에 몸을 씻기 전에 “파 놓고, 파고, 돌아오고, 가라앉히”는 행위를 먼저 보여준다. 둠벙에 “씻고 빨고 닦아야 하는 것들을” 내맡기며, 더러 소금기 밴 몸을 이끌고 둠벙 속에 들어가기도 하며 하루치의 노동을 갈무리하는 행위는 정갈하다. 그러나 둠벙은 고맙거나 정답지만은 않다. 어느 겨울 세찬 바람에 배가 뒤집혀 삼동네 아낙들이 줄초상이 났을 때 “바다로 생을 번 신발이” 떠말려 와서 “몸 대신 가라앉”았던 비극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둠벙은 비통한 기억을 물고 있는 장소가 되고 만다. 그러나 둠벙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바다’가 섬사람들에게 원(怨)을 심어 주려고 우물을 파놨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둠벙은 이 지점에서 삶과 죽음의 기억이 공존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된다. 순간 시상(詩想)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가슴 속에 둠벙 한 개씩 파놓고 산다는 사실로 확장된다. “바다로 생을 번 신발이” 둠벙에 몸 대신 가라앉는다는 한(恨)의 정서는 서늘하다. 한(恨)은 슬픔의 무늬를 간직한 그늘의 색채가 있지만 그것은 원망의 응결체가 아니라 삶의 비극성까지를 긍정적으로 품어주는 웅숭깊은 지혜 아닌가. 원통절통한 사연에 얽매여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게 원(怨)이라면, 뼈마디가 녹아들 법한 개인의 불행을 위로해주고 삭혀주는 윤리적 조절장치이자 삶을 살도록 북돋워주는 정서가 한(恨)의 미학 아니던가 말이다.
  전홍준의 시편들은 이런 정서를 곳곳에 품고 있다. “바람 사납던 여름날 똥섬에서 배가 뒤집혀/ 같은 날 시아버지와 남편을 함께 잃은”(「고욤나무 밑」) 무성오매 이야기, 육이오 때 상구아비가 어미 앞에서 붙잡혀 간 뒤 “거문여 앞바다에 맷돌과 함께 수장당했다”(「고욤나무 밑」)는 사연, “허천난 공출에 실려 올라오던 물살이/ 이 바위 근처에서 부서졌던가”(「쌀썩은여」)에 이르기까지 시 속에 꿈틀꿈틀 되살아나는 비극과 노여움의 정서를 가라앉히고 삶을 따뜻하게 비끄러맨다. 늦장가 든 만섭이 아저씨가 벌초하는 것도 잊어먹고 “만삭의 처 봉분”(「벌초」)을 쓰다듬듯 김 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가난과 속절없이 잃어버린 동생, 아내의 암투병 등의 개인사는 지난하다. 사람의 우여곡절을 환기하는 파출수납가방을 들고 이집 저집을 방문해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시인의 발걸음도 가볍지만은 않다. 그러나 그의 시 속에 형상화된 정서는 따뜻하다. 비통한 삶을 바라볼수록 그의 시선은 더 맑아진다. 시인은 오래 전부터 한(恨)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며 한국적 삶은 이 한의 그늘 속에서 깊어진다는 사실을 체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들었시요 저기 오는 성기아배 말이요 메칠 전이 병년네서 까나리액젓일 허구 동네 남정네들 모여서 옻닭을 먹었잖어 그때 성기아배두 옻 타는 줄 물르구 덜컥 먹었나벼요 옻 탈 때는 원래 똥구녕부터 살살 올러오다가 사탱이루 와서는 좆 끝에 붙으면 순식간이 확 꽃을 피운다잖여 그란디 광옥이네 성님이 수상허요 얼굴에 꽃이 피구 자꾸 속살을 긁적거리능 게 뭔 조화가 단단히 생긴 거 같으요 옻닭이야 남자들끼리만 먹었는디 과부댁이 급한 짐이 그 집 화장실이 가서 똥김을 쐰 건 분명 아닐 테구 참말루 요상스럽네 그 성님 마주치면 얼굴이 볽으족족허니 보기는 좋더구만 우덜이 물르는 꽃 피는 사연이 있었나 슬그머니 성님, 서엉님― 워디서 옻닭이라도 자셨나 물어볼까유 에이, 사람아 그런 건 물르는 체 허는 게 도와주는 겨
                                                                   -「열꽃」, 전문

  
  이 시는 삶의 행위 이면에 감춰진 욕망의 질긴 호기심을 파고든다. 우리에겐 한의 정서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듯 까나리액젓일 하고 나서 생긴 뒷담화를 거침없이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의 한국시에 이같이 해학성 견지하고 있는 작품이 있을까 할 정도로 이 시에 드러난 행위는 걸림새가 없다. 옻닭을 해먹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옻을 타는 성기아배와 과부댁 광옥이네 성님에 이르러서 섬사람들의 호기심은 절정에 이른다. 물론 이 절정에 이르기 전에 꼭 통과해야 할 말맛의 순서가 있으니 그 구절이 “옻 탈 때는 원래 똥구녕부터 살살 올러오다가 사탱이루 와서는 좆 끝에 붙으면 순식간이 확 꽃을 피운다잖여”이다. 옻을 타는 가려움증이 급기야 남자의 성기 끝에 붙으면서 순식간에 꽃을 확 피운다는 통쾌한 어법은 그간에 시달렸던 삶의 우여곡절을 한 순간에 털어버리고 풀어버리게 하는 것이다. 문명적 잔해 또는 메신저와 SNS로 박음질당하다 못해 개인주의 풍토에 유폐되다시피 한 일부 시들이 단번에 매료될 법한 언어미덕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이것이 살맛이 나고 말맛이 난다는 우리말의 또 다른 모양새다.
  전홍준의 시가 보여준 한의 정서와 해학의 입담만으로 그의 시를 모두 말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의 시는 삶과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건어물 위판장을 지나던 화자가 “바다를 품었던 잔 비늘이/ 지나온 물결의 깊이를/ 바닥에 붙어서 두껍게 쓰다듬는다”(「비늘」)는 이를 뒷받침한다. 어떤 생선이 되었든 위판장 바닥에 비늘이나 남겨둘 요량으로 바다 속을 유영하지는 않았을 터이고 바다 속 물결의 깊이나 쓰다듬으려고 풍랑을 견디지 않았을 것임도 자명하다. 위판장 바닥에 붙은 생선비늘은 인간의 삶을 환기한다. 누군가가 돈과 문명으로 구획해놓은 세상을 더는 어쩌지 못하고 시간의 두께나 쓰다듬는- 결국 이런 삶을 살려고 자존심 상하면서까지 시간을 버티었던가하는 소외감이 문득 뼈에 사무치므로 그렇다.  


사람 좋아 보인다는 말이 달갑지 않다
사람 좋아 보인다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니다
사람이 뒤무르면 자기 것도 못 챙기고
울타리 단속도 못하며 산다
성질도 없는 놈이라고 웃음거리밖에 못 된다
성질도 부리는 놈이 부리는 것이라니
더럽다고 피하는 똥이라도 되어야 한다
쌀 내놓으라면 쌀 퍼주고
미친 쇠고기 먹으라면 미친 쇠고기 먹고
간도 쓸개도 없이 사람 좋다는 소릴 듣느니
짐승처럼 뵈더라도 몽둥이를 들 때는 들어야 한다
                                                 -「달갑지 않은 말」, 전문

  
  우리는 야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무엇인가에 잘못 길들여진 것은 아닐까. 이 시는 지금 우리의 현주소를 묻는 듯하다. 문명과 자본과 권력의 잉여물처럼 남은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뭔가를 챙겨야하고 단속해야 하며 성질을 부려야 하는, 남들이 “더럽다고 피하는 똥이라도 되어야 하”는 세상을 엄히 짚어보고자 하는 시의 욕망이 꿈틀거린다. 사람이 예전과 달라졌다 또는 사람 버렸다는 말을 듣는 한이 있어도 “사람 좋아 보인다는 말”을 깡그리 폐기하고 싶은 화자의 결기 서린 목소리는 “짐승처럼 뵈더라도 몽둥이를 들 때는 들어야 한다”에 와서 격해진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은 명쾌하게 답을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물음에 답을 미루는 것도 삶을 대하는 바른 태도는 아니다. “쌀 내놓으라면 쌀 퍼주고/ 미친 쇠고기 먹으라면 미친 쇠고기 먹”어야 했던, 우리가 잃어버린 야성을 아직도 책상 서랍에 함부로 구겨놓을 것이냐고 이 시는 항변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 정서의 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한의 정서가 불감증을 양성하는 미온적 삶의 태도를 지양하는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안면도는 애초에 섬이 아니었다가 억지로 섬이 되었으며 콘크리트 다리가 놔지면서 다시 육지로 연결된 섬이라고 한다. 여기에 뿌리를 둔 전홍준의 시는 오늘의 한국시를 다시 한번 살려봐야 할 여지를 충분히 갖고 있다. 그의 시편들에는 사물과 현상에 대한 즉물적 인상이 적고 오랜 시간 한국인이 간직해온 어법이 시의 문면에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명적 색채를 짙게 드러냄으로써 문명의 이기성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시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더욱 문명과 자본주의에서 못 벗어날 것 같은 느낌이 되레 강해지므로 그렇다.
  유쾌하지 못한 이런 생각을 고르게 펴주는 전홍준의 시는 평온하고 단단하다. 안면도에서 태어나 그 근처를 벗어난 적이 없는 여정,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배고픔의 긴 공복이 자리 잡을 뿐”(「겨울」)일지라도 그의 시편 곳곳에 언표되는 행위들은 오래된 것들을 따뜻하게 매만져주는 한의 정서처럼 정답다. 언어를 폐기하려는 과정인가를 따져볼 정도로 시의 문맥을 고의로 훼손해버린 일부 시를 이해하려다 책을 덮어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전홍준의 시가 더 값지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그의 시는 뭔가를 보고 듣고 느끼면서 어떻게 사는 게 아름답게 사는 삶인지를 행위의 연속성을 통하여 체득해 갈 것이다.
                                                                 -『작가마루』, 2019년 하반기.



[2020-02-02 15:55:22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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