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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도서관49.책『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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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서관> 49. 책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 연금통지서를 기다리다 -


​ 대학교 2학년 때였을 게다. 학우들과 웬만치 친해지지 못해 자투리 시간이 데면데면해질 때면 나는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그 해 아마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것 같다. 나는 국문학도였지만, 문학과 노벨문학상의 참모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와 소설에 무작정 가슴 설레는 문청(文靑)이었으므로, 세계인이 주목하는 그의 책들을 사고 싶었다. 그러나 고작 청바지 한 장과 티셔츠 두어 장으로 가을을 나는 나에게 그의 수상작 『백 년 동안의 고독』 두 권짜리를 사서 읽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좀 얇고 책값이 싼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를 사서 읽게 되었다.



  그로부터 35년 이상이 지났다. 누군가가 나에게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책 한 권을 꼽아 보라고 하면 이 책을 꼽는 것에 서슴지 않을 것이다. 소설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 긴긴 시간동안 내 귓전에 줄곧 이명처럼 떠나지 않는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지 않는 연금통지서와 편지를 기다리다 지친 가난하고 병든 대령의 10월 어느 아침, 한 숟가락 겨우 남은 마지막 커피통 바닥을 다악닥 긁는 소리, 천식을 앓고 있는 그의 아내가 밤새도록 해대던 발작적인 기침소리가 그것이다.

아들이 계엄령 하에서 비밀문서를 돌리다 들켜 사살당하기 전 그들 부부에게 남기고 간 수탉이자 싸움닭이 침대 다리에 묶여 꼬꼬대며 동네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던 소리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영화나 연극을 본 것처럼(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음) 지금도 생생하다. 오늘 나는 이 소설을 다시 읽는다. 너무 오래되어 누렇게 색이 바래서 만지면 바스라질 것 같은, 일반 서가에서 밀려 창고에 갇힌 이 책을 돋보기를 끼고 읽는다.

                                                                                                  

  대령은 무려 15년째 연금통지서를 기다리는 중이다. 매주 금요일, 국가가 약속한 통지서를 받으러 항구에 갈 때면 그는 낡은 양복을 입었고 구두를 신었다. 그러나 연금통지서는 물론 어떤 소식도 오지 않았고 그는 항구에서 멋쩍게 서성이다 되돌아오곤 한다.

그는 밖의 소식을 거의 듣지 못하고 산다.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가끔 천식환자인 아내를 치료하기 위해 방문하는 젊은 의사가 가져 온 신문을 빌려 읽는 일, 때로는 돌려보라며 비밀리에 건네주는 문서를 죽은 아들 친구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전해 주는 게 전부다.

이제 집안에 돈이 될 만한 물건도 거의 없다. 정물처럼 서 있는 기둥시계와 그림 한 점을 그의 아내는 내다 팔라고 성화다. 하지만 살 사람도 없을뿐더러 그것이 그들 목숨을 몇 조금이나 연명시킬 것인가. 돈이 될 만한 것은 죽은 아들이 남긴 수탉인데, 그 닭이 시합에서 일등할 거라면서 돈을 모으는 어린것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다. 그의 부자 친구는 그 수탉을 헐값에 사들이려고 잔머리를 굴린다.

아내로부터 “산 채로 썩고”, 결국 수탉에게 “우리의 간을 떼어 먹일 것”이라는 탄식을 거푸 들으면서도 그는 버틴다. 내란으로 정권이 7~8번이나 바뀌어 그의 연금증서가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더라도, 75세의 10월. 뼛속으로 한기가 스미어 몸이 더욱 오그라들지라도, 죽은 아들 친구들이 사준 수탉먹이용 옥수수를 조금씩 떼어 먹으면서 그는 버틴다. 분명히 연금통지서는 올 것이므로.



  아주 오래전 뉴스가 떠오른다. 마르께스가 태어났고 이 소설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콜롬비아는 반정부 운동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찾고자,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

김남주 시인의 “나라로부터 받아본 것이라고는/납세고지서 징집영장 밖에 없는(「그러나 나는」)”이란 시 구절처럼 이런저런 참상 속에서도 세계사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대학시절보다 바지와 셔츠를 10배 이상 더 갖고도 나도 세상도 여전히 아름답지 않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 나는 감당하기 힘든 가슴앓이를 했었다. 그럴 때면 낯선 버스종착역에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구이 저수지 둑에서 내려앉는 어둠과 함께 했었다. 오랜 시간 서성이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 책을 다시 읽고 난 지금 문청시절에 겪었던 답답증과 울렁증보다는 통증이 훨씬 덜하다. 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우문(愚問)은 도돌이표처럼 살아나 나를 난감하게 한다. 아직도 기다림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면서 자꾸만 등을 떠민다.


생각해 보니 나는 너무 이른 나이에 가난과 고독을 지척에 두고 살았다. 웬만큼 나이가 들고부터는 오히려 그것들과 함께 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 적도 많았다. 일부러 도망하며 살았다.

사람들과 세상의 중심에서 어깨를 나란히 겨뤄보고자 안간힘을 썼으나 내가 그런 위치에 나아갈 수 있도록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저곳에 끼어서 실컷 얻어터져 깨지기 일쑤였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내 삶을 뒤따라 다니며 조정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 그렇다고 철저하게 아웃사이더도 되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사이 나도 늙은 대령처럼 연금을 기다리고 있을 나이가 가까이 되었다. 이 생존을 위해 그 긴 시간 자존심을 내려놓았던가. 나를 팽개쳤던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불협화음. 이제야 겨우 이곳에 다다랐는가.  / 이현옥(우석대 도서관 사서)


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344






[2020-01-08 03:42:59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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