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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맑은 시비평5. 오탁번-알불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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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맑은 시비평>5. 알불


알 불

  오탁번(1943~)의 시집 『알요강』(2019, 현대시학)을 만났다. 어디 한 군데 틀어짐 없이 반듯하고 소소한 삶의 모습에 정답게 다가서되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알랑똥땅 넘어가지 않는 그의 시편들은 예스럽고 친근하면서도 맵다. 특별하지 않고 잘난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는- 낮곁, 녈비, 볼꼴 좋다, 간동하다, 지날결, 보시기, 하동하동, 쥐코밥상, 물만밥, 멧갓, 건들장마, 거먕빛 등의 순 우리말들이 조선인의 품성을 빼닮은 듯 점잖고 개구지고 살갑게 자리하고 있다.

  한국적 삶의 원형질을 간직했을 법한 이 말들은 불평등한 세계를 묵묵히 견디는 군상을 환기함과 동시에 새것의 강박에 시달리는 한국시의 오늘을 찬찬히 돌아보게 한다. 순 우리말의 어법을 토대로 말의 맵시를 빛낸 오탁번의 시편들에는 의미는 실종되고 이미지만 조악하게 남은 일부 시들의 병적 징후가 끼어들 틈이 없고 기발함과 독창성에 포장된 문명적 무례함이나 낯선 일탈이 없다.



    참나무 소나무 뽕나무

  나무마다 불땀도 냄새도 다 다르다

  불땀은 단연 참나무!

  냄새는 소나무!

  이글대는 참나무 알불은

  혀를 대보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다

  소나무 뿌다구니 송진 타는 냄새는

  술보다 독하다

                                 -오탁번,「난로」, 부분



    
  

  이 시는 오탁번 시의 근황을 보여준다. 붓에 먹을 묻히자마자 죽죽 써내려간 듯한 이 시에는 침전된 자의식이나 겨울 정서의 깡마른 뒷갈피 이런 게 없다. 화자는 단지 난로에 불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장작개비 형상에 불땀이란 시어가 맞물려지듯 불이 붙고 드디어 불꽃이 이글거린다.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오탁번의 시는 불길이 알불로 이글거리는 지점에서부터 일렁이기 시작한다.

  흔하디흔한 일상을 다따가 일으켜 세우듯 “혀를 대보고 싶을 만큼 유혹적인” 알불이라니. 뿌다구니에 박힌 채 타는 송진 냄새가 “술보다 독하다”니. 평범하기 그지없는 시상이 돌연 팽팽하게 긴장된다. 이글거리는 불길에 혀를 대보고 싶고 술보다 독한 송진 타는 냄새에 취하고 싶은 화자의 욕망은 죽음의 의식에 가깝다. 에로티즘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라고 했던가. 에로티즘과 죽음의 의식은 자웅동체라고도 했던가. 혀를 대보고 싶을 만큼 유혹적인 불길, 술보다 독한 송진 타는 냄새는 목숨의 끝까지 가보고 싶은 화자의 욕망을 이글거리게 한다.

  붓을 벼려 죽간에 한 자씩 뜻을 새기듯 국어사전을 몇 번이고 펴보며 혼을 쥐어짜듯 시어를 고치고 다듬었을 오탁번 시인. 그의 치열성은 시의 갱신을 절실하게 고민해보기는커녕 대중적 성감대에 초점을 맞춘 시들을 부끄럽게 한다. 물화된 세상을 견디는 시의 동력은 대중적 흡인력이나 단 1초도 손해보고 싶지 않은 소수 지식인의 당착적 언술에 있는 게 아니라 불행한 역사의 진실을 육화시킨 언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최근의 어떤 시들보다도 배젊은, 팔순을 목전에 둔 오탁번 - 그의 시 근황이다.  

/ 이병초(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735

[2019-11-07 13:40:45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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