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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맑은 시비평4. 이정록 '참 빨랐지 그 양반'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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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맑은 시비평> 4. '참 빨랐지 그 양반' - 이정록




외마디 비명 한번에
  

  우리말의 결을 아끼는 시가 있다. 시적 상황에 딱 들어맞는 단어를 정히 고르고 단어끼리 어울려 소리와 뜻의 새 결이 이뤄지는 진경을 보여주되 우리말이 가진 어법을 존중할 줄 아는 시.

  이정록의 시편들이 이와 같다. 그의 시편들은 은은한 듯 장쾌하고 시행에 가락의 유장함이 물결처럼 굽이치되 우리말의 세공이 무엇인지 공력을 들여, 여실히 보여준다. 이 시편들은 누구든 쉽게 읽으라고 쓰는 것이 시(詩)이고, 거기에서 우러난 사람 냄새가 이 곤혹한 시대의 희망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여기에 일상의 토막을 해학으로 녹여낸 이정록 시의 또 다른 품을 만나보자.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 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녓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년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 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이정록, 「참 빨랐지 그 양반」, 전문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이 시의 주인공이다. 맞선본 여자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다가 울퉁불퉁 출렁이는 여인의 젖가슴에 피가 배꼽 아래로 쏠려 급기야 밀밭에서 번개같이 일을 치른 사나이. 후다닥 그 짓을 끝내고 뭐가 민망한지 “밀 이삭만 씹고 있던 사나이". 뜀박질 잘하고 몸이 불곰같이 장중해도 음양의 오묘한 이치에 핏줄이 툭툭 불거진 채 식식거리는 자라대가리엔 힘이 못 미쳤던가보다. 그 조루증 덕분에 죽을 때까지 바람 한번 안 피웠다는, 가정용도 안 되는 정력을 가지고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냐는 여인의 넉살이 오지게 정답다.  



  이정록 시인은 요즘 사람들이 시를 너무 안 읽는다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써도 안 읽을래?” 하는 심정으로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얘기는 엉뚱하게 돌아온 모양이다. 이 시를 읽은 그의 지인들이 대놓고 그러더란다.

“이정록, 이거 네 얘기지?”    

/ 이병초(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2019-11-03 22:31:52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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