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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통14. 미리 짜놓은 각본 5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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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성장통> 14. 미리 짜놓은 각본 5

  5.

  우리는 당황했다. 결투장에 적힌 약속을 지켰네 안 지켰네를 따질 계제가 아니다. 단 둘이 저 열댓 놈들을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얼마나 버틸 것이냐. 무협지에서는 혼자 백오십 명도 상대했다지만 그런 어마어마한 내공이 우리에겐 없다.

  싸움터가 넓든 좁든 무릎과 팔꿈치를 써서 단번에 상대를 제압할 줄 알았고 상대방 허리를 나꿔채어 바닥에 패대기칠 줄도 알았지만 그 쌈수만으로 열댓 명을 상대하는 것은 개박살나는 지름길일 것이다.

  도망갈 수도 없다. 결투장 저버린 놈이라는 말을 듣느니 여기서 맞아죽는 게 낫다. 우리는 저 열댓 놈들이 줴지르는 몰매를 못 견디고 병원에 실려 갈 것이며, 화호고 연대장은 A고 연대장에게 즉사하게 얻어터져 병원에 입원했다고 김제 읍내에 소문이 짜악 퍼질 터이다.

  1:1로 맞장을 떴든 나 혼자 열댓 놈을 상대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어떤 사실보다도 내가 A고 연대장에게 작살났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너 그냥 내려가라.”

  노규가 눈알을 빛냈다.

  “무슨 소리냐, 지금 나더러 도망가란 말이냐. 너야 말로 내려가라. 저것들 씨알머리까지 족쳐 놓을 테니까 배차장 삼거리에 가서 친구들 데꼬 빨리 이쪽으로 와라.”

  “시벌, 너 깨지먼 화호고는 없다. 내가 버틸 때까지 버틸 팅게 아덜뜰 데꼬 후딱 와라.”

  “안 된다. 여그서 함께 죽자.”

  녀석은 눈을 부릅떴다. A고 애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더 지체한다면 둘 다 죽사발이 날 게 빤했다. A고 애들 대갈통이 보이기 시작했다. 녀석은 김제 시장 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가리키며 눈알 속에서 쌀알 같은 빛을 쏘아댔다.

  중 3때 황방산 용천에서 이서면 애들과 패쌈 붙었을 때 보았던 눈빛이었다. 3:5로 수가 달렸지만 절대로 깨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눈빛이었다. 더구나 거기는 우리의 똥밭이니 작전상 후퇴를 할 때도 어디로 튈지를 꿰뚫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황방산이 아니었다. 김제읍의 길이 어디서 어디로 뚫렸는지를 우리가 알 턱이 없었다.

  시간이 없다고, 빨리 안 튀고 뭐하냐고, 차갑게 쏘아보는 눈빛에 밀려 나는 노규에게서 등을 돌렸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남자건 여자건 의리가 없으면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침이 튀던 국어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박혔건만 나는 친구를 적지에 버려두고 줄행랑치기 시작했다.

  김칠구, 이 나쁜 놈! 제 쪽에서 먼저 맞장뜨자고 그래놓고 열댓 놈이나 데려온 비겁한 놈, 하지만 내가 더 비겁하다는 소리가 귓속에서 웽웽거렸다. 일제 경찰 앞잽이보다 내가 더 나쁜 놈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주머니 것을 다 꺼내라고 조선낫을 제 목에 걸고 으름장을 놓던 선배에게조차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노규. 하지만 오늘은 그 믿음에 자신이 없었다. 내 입에선 김칠구란 이름만 튀어나올 뿐이었다.

  비겁한 놈, 김칠구 이 나쁜 놈 이러면서도 나는 도망치는 데 도가 튼 놈같이, 여태 도망만 치고 살아온 놈처럼 잽싸게 김제 시장 쪽으로 내뺐다.

  4월 중순인데 러닝셔츠가 축축하게 젖었다. 배차장 삼거리에 친구들이 와있어야 할 터인데, 지금쯤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발길은 왜 이리 더딘 것이냐.

  혼자 깨지는 게 낫다고 판단한 노규는 지금 몸뚱이 어디가 도매금으로 개창나고 있단 말이냐. 조금만 버텨라, 어디 죽일 테면 죽여보라고 제발 몸을 함부로 맡기지 말아다오. 사람 몸같이 허술한 게 없다는 것을 명심해다오.

  쌈의 판수가 나보다 많았고 눈을 뜨고 상대 주먹을 맞을 만큼 쌈수 또한 월등히 높았지만 그러나 녀석 성질은 내 바람을 깡그리 뭉갤 것이다.

  “삼청교육대 땜시 대한민국에 깡패가 없어졌다더니 씨벌 여그는 깡패가 좆다발로 있네!”

  고함을 꽥꽥 내지르며 줄넘기 넘으면서 배운 스텝을 밟으며 닥치는 대로 주먹을 내지를 것이다. 군더더기 없이 휘어치고 올려치는 주먹과 바람소리를 내는 발길질은 김칠구 패거리를 당황스럽게 할 것이다. 짜식들이 당황스러워하는 한가운데로 파고드는 녀석의 스텝이 경쾌하게 흙먼지를 일으킬 때마다 칠구 패거리들이 나동그라질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버틸 것이냐. 쪽수가 달리니 제 주특기인 박치기를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뒤로 밀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짜식들에게 빙 둘러싸여 발길질에 무참하게 깨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맷집이 황소같을지라도 눈팅이가 밤팅가 된 것은 물론이고 박이 터져 피를 철철철 흘리며 짜식들이 무식하게 줴지르는 주먹질 발길질에 갈비뼈가 작살났을 것이다. 얻어터지면 터질수록 몸이 반응하는 쾌감, 미치게 살고 싶을 때마다 미치게 맞아죽고 싶었던 쾌감, 그 저주스런 쾌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맨바닥에서 떼굴떼굴 구르고 있을 것이다. 숨 막히고 있을 것이다.

  아아, 나는 왜 노규를 거기에 내버렸던가. 나는 왜 김칠구 패거리에게 직사하게 얻어터지지 못했던가.  <다음편에 계속>

    
  이병초 시인.

  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730



[2019-04-15 20:25:02 에 등록된 글입니다.]



 성장통14. 미리 짜놓은 각본 5  김경운  2019-04-15
20:25:02
     그렁게 왜 그렇게 비겁허게 도망갔다냐.  鄭洋  2019-04-20
21:4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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