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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통9 아무렴,그렇지그래야허고말고 3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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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성장통> 9. 아무렴, 그렇지 그래야 허고말고3

3.

  서로 알아볼 수 있는 거리에 와서 살짝 고개를 드니 이런, 숙이가 아니다. 옆 반 새침떼기 민정이다.

  “시장에 갔다가 오냐?”

  민정은 웬일로 말을 다 걸었다. 응, 짧게 대답을 했다. 유제리까지 가려면 한참 멀었는데 힘들겠다, 뒤에서 밀어줄까, 아이스케키 한 개 사줄까 뭐 어쩌고저쩌고 민정이보다 민정이 언니가 더 많은 말을 했다.  

  아는 사람들을 되도록 피하고 싶어서 걸음을 재게 놀렸다. 누구에게도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전주제지 후문 쪽에 와서부터는 걸음이 탁 풀렸다. 집에 가까이 온다는 느낌이 싫었다. 동네 아저씨들이 죽치고 있을 방죽미티를, 꺼먹둥이네집 이쁜네집을 통하지 않고 가는 길은 없을까.아저씨들은 나를 보자마자 어디 갔다가 오냐고, 밥은 먹었냐고 막걸리 냄새를 풍기며 다가올 것이었다. 내 아버지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이 분들은 오늘도 고함을 지르며 노름윷을 놀았을 것이고 내 입에 꽈배기라도 물려서 집에 보내고 싶을 것이었다. 아무도 안 만나고 싶은, 제발 이대로 나를 내버려 둬 달라는 마음을 아는지 바람이 볼을 때리고 지나갔다. 어머니가 제안한 약속을 믿고 최선을 다했어도 새옷은커녕 빈 리어카나 끌고 돌아오는 내 처지를 더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과 한 약속을 저버린 나를 따돌리고 싶은지 초가을 햇살이 따가웠다.

  서산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검붉어지기 시작하는 수수들도 나처럼 고개를 팍 숙이고 빈 리어카를 따라왔다. 뛰뛰해진 입을 앞으로 더 내밀며 집에 돌아오니 저녁때가 다 되었다. 어머니는 밭에 갔는지 안 보이고 새옷을 차지한 동생들은 마당에서 신나 있었다. 씻지도 않고 내 방으로 들어가 누워 버렸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아버지 오셨다는 소리가 들렸다. 마루로 나가서 인사를 하고 다시 내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잠시 후 밥 먹으라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굶고 싶었지만 아버지께서 계시므로 어쩔 수 없이 안방으로 건너갔다.

  “큰아야 오늘 고생 많었다. 그런디 니 옷만 못 샀담서? 그래서야 쓰나. 내일 당장 중앙시장에 가서 니 옷을 사자. 약속은 지켜야지.”

  밥상에 들어붙은 동생들 앞에서, 동생들이 나를 빤히 바라보는 데서 속 보이게시리 아버지께서 입을 떼셨다. 새 옷을 차지한 동생들은 수저를 들고 이제나저제나 밥 먹자는 아버지 말씀만 기다리고 있었다. 지들의 큰오빠인, 형인 내 처지를 눈곱만큼도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고구마순 넣고 갈치를 지진 양푼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밥 먹자는 아버지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양푼 속의 갈치는 뼈째 발라질 것이었다.

  동생들은 남들에게 엄마를 들키고 싶지 않다는 것이 뭔지도 모를 것이고, 내가 리어카를 끌고 사십 리 가깝게 걸었던 길도 모를 것이었다. 혼자 빈 리어카를 끌면서 새삼 서럽던 초가을 햇살도 모를 것이었다. 새 옷을 차지하면 그만이고 맛있는 반찬을 먼저 먹으면 그만인 동생들.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먹을 것 없냐고 쪼르르 달려와서 무작정 매달리던 동생들. 이런 동생들을 보니 낮에 새 옷 사내라고 떼를 썼던 것이 조금 창피했다.

  “어째 대답이 없냐? 이 애비가 니 옷 한 벌 못 사줄 것 같아 보이냐?”  

  “괜찮아요. 몇 달 있으먼 중학생 양복도 생기고 가방도 생기고 운동화도 생기는디요, 머”

  “아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약속을 안 했으먼 몰라도 그래서는 안 되는 거다.”

  “아니에요. 인자 저도 다 컸는디요. 추석 날 용돈이나 좀 주세요.”

  “그러먼 안 되는디 잉? 그러먼 안 되는 것이다잉. 근디 그래도 되것냐? 너 참말로 서운허지 않것어? 아무렴, 그래야지. 큰자식인디 우리 집안 장손인디 아무렴, 그렇지, 그래야 허고말고.”

  아버지는 내 속도 모르고 감격해 하셨다. 동생들도 어머니도 그랬다. 밥상에 입을 쩍 벌린 양푼같이 모두들 밝은 표정으로 갈치 지진 것을 발라먹었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새옷을 입고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새옷을 입고 숙이와 가지런히 들길에 나서는 꿈을 꾸었다. <다음편에 계속>

    
이병초 시인.





[2019-03-06 17:37:40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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