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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라린 눈물 하도 많아서
작성자 : 鄭洋 



  쓰라린 눈물 하도 많아서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이 시는 1970년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맘에 꼭 드는 번역은 아니지만 비교적 원시에 충실한 번역이었다

   비 개인 언덕에 풀빛이 푸른데
   남포로 임 보내는 구슬픈 노래
   대동강물이 언제 마르리
   해마다 이별 눈물 보태는 것을

  <송인送人> 혹은 <대동강>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정지상鄭知常의 이 절구絶句를 수년 전 어느 책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번역해본 일이 있었다.

   비 멎은 언덕에
   짙푸른 풀빛
   남포로 임 보내는
   슬픔도 짙다
   이별도 많은 대동강물
   어느 때나 다 마르리
   이별 눈물 하도 많아서
   마를 날이 없단다

  의역意譯이 좀 지나쳐서 오히려 어색해진 흔적이 역력하지만 원시原詩의 속뜻을 보다 가깝게 헤아리고자 하는 욕심을 나는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물론 욕심일 뿐 이런 정도의 오버액션으로는 그 속뜻이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국어교과서에는 그와 관계되는 자습서나 문제집을 바탕삼아서 입시지도를 하곤 했었다. 그 자습서나 문제집들 중에는 우리 교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공부해야 할 내용도 많았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이 시에 관한 한 그 어느 자습서나 문제집에서도 이 시의 핵심에 접근하는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었다. 이 시의 지은이가 정지상이고 그가 묘청과 함께 서경천도를 도모하다가 처형당한 반체재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자습서마다 밝히고는 있었지만 정작 지은이의 그런 생애나 사회적 배경을 이 시의 내용과 연결시켜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는 그 어느 자습서나 문제집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시가 지금도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나오는지, 나와 있다면 자습서나 문제집의 내용들에는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는지 나로서는 미처 알지 못하거니와, 문학작품이 제공하는 사회적 상상력을 의도적으로 거세시켰던 그 무렵의 옹색한 입장이 어쩌면 그렇게 철저하게 모든 자습서나 문제집에 일률적으로 적용되었는지에 대해서 지금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왜 목숨을 걸고 서경 천도를 도모햇던가,서경 천도를 주장하던 고구려적 정통성과 김부식을 축으로 삼은 신라적 정통성이 이 시에서 어떻게 첨예하게 맞물려 있는가, 그로 인하여 야기된 고려시대의 극심한 지역차별과 악랄한 사민정책徙民政策의 참상이 어떠했던가, 대동강에서는 왜 그렇게 처참한 이별이 많았던가 등등, 당연히 짚어보아야 할 이 시의 문제점들이 너무나 천연스럽게 외면당한 채 고작 과장법이나 비약법, 시적 재치나 이별의 정한 따위가 당시 지습서나 문제집에서 이 시와 관계되어 다루어지던 단골 메뉴였다.
  특정지역의 민중적 응집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 지역출신의 관리 등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그 지역 주민들을 여기저기 강제로 이주 시키어 뿔뿔이 흩어지게 하던 그 사민정책徙民政策 때문에 당시의 서경(평양)에는 그런 참담한 이별이 많았을 것이고 조세정책도 그 특정지역에 대한 착취를 노골화했고, 노역勞役으로 강제로 끌려가는 남정네들이 그 지역에 유난히 많았을 것이다. 그들의 이별은 몇 달이나 몇 년이 지나면 다시 만날 수 잇는 그런 이별이 아니었다. 한번 헤어지면 다시 못 만나는 그런 이별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전라북도 김제시 변두리에 <신털미산>이라는 자그마한 산이 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지평선이 보이는 들녘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산이다. 애초에는 산이 아닌 자그마한 언덕이었다고 한다. 벽골제碧骨堤리는 둑을 쌓기 위하여 당시 전국 각지에서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 일하다가 쉴 때마다 모여들던 언덕이었다. 그 언덕에 모여 쉴 때마다 일꾼들이 신바닥에 묻은 흙을 털었고 그렇게 신바닥 털어낸 흙들이 모여서 산처럼 쌓였다고 한다. 두고 온 식솔들과 고향이 그리운 그들의 한과 뼈가 묻혀서 만들어진 산이 바로 오늘날 키 넘는 억새풀만 무심히 우거져 있는 <신털미산>이다. 한번 시작했다 하면 수십년씩 걸리는 그런 대역사大役事, 한번 끌려가면 그 곳에 뼈를 묻어야 하는 그런 역사役事가 전라도의 벽골제뿐이엇으랴. 그런 역사마다 당시 핍박이 심햇던 서경 사람들이 유난히 더 많이 끌려다녔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슬픔과 고통과 절망과 원망에 잠겨 있는 사람에게는 눈부신 날빛이나 아름다운 풍광들은 위로가 되기는커녕 차라리 더 억장이 막히는 법이다. 비 멎은 대동강변의 그 풀빛과 무르익은 봄날은 정든 고향과 처자식을 두고 끌려가는 사람들이나 그를 보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동강변의 고운 풀빛과 아름다운 경치는 더 원망스럽고 억장이 막히는 풍광이었을 것이다. 풀빛이 짙을수록 그들의 이별은 더 모질고 슬프고 원통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고구려적 정통성을 근거삼아 나랏일을 꾸려나가려던 사람들,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어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려던 민족주의자들 때문에 서경땅이 무자비하게 지역차별을 받았던 사실을 되새기지 않는다면 이 시의 이별의 한은 한낱 수사적 과장이나 재치 이상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 시가 쓰여지던 당시의 고려는 대외적으로 안정을 도모하면서 사대주의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민족주의는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었다. 민족의식을 유난히 강하게 표출시켰던 서경사람들이 중앙정부의 핍박을 집중적으로 받은 것은 당시로써는 쓰라린 상식이었을 것이다. 이별하는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 때문에 대동강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이 시의 과장된 진술은 그러므로 단순한 미학적 가치의 대상만이 아닌, 사회적 상상력을 절실히 요구하는 역사적 앙금이다.

[2006-12-08 15:03:05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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