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洋의 홈



미국과 한반도의 핵
작성자 : 鄭洋  (홈페이지)


이재봉 하와이대학교 정치학박사 원광대 정치학/평화학 교수 남이랑북이랑 대표

남한의 핵무기 도입과 미국

I. 시작하는 글

북한 핵무기에 관한 문제가 1990년대 초부터 남북관계 및 한반도 주변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2008년까지 거의 20년이 흐르도록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가까운 미래에 해결될 조짐도 없어 보인다. 무슨 문제든지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가 언제부터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근본적 배경이나 원인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갖게 된 가장 큰 배경과 직접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무기 공격 위협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부터 북한을 핵무기로 공격할 수 있다고 위협해왔으며, 늦어도 1958년부터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남한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예를 들어, 글쓴이는 미국 국무부가 1993년과 1994년에 비밀 해제하여 출판한 1950년대 후반의 외교문서 자료집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을 바탕으로 주한미군이 1958년 1월부터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짤막하게 언급한 논문을 1995년 발표한 적이 있다. 당시 남한에서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자랑한다는 한 신문사 기자가 이에 관해 글쓴이를 인터뷰하고 자료를 복사해가면서 '1면 머리기삿감'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머리기삿감은 지금까지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북핵 문제로 민감한 시기에 '위험한 내용'이라는 신문사 간부들의 판단 때문이었다.

남한에 핵무기가 배치된 사실이 어렴풋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다. 첫째, 에이브람스 (Creighton Abrams) 미국 육군참모총장이 1974년 3월 의회에서의 증언을 통해 제한적인 핵전쟁을 위해 '현대화한 전술 핵무기'인 랜스 (Lance) 미사일을 남한에 배치하고 있다고 밝혔다. 둘째, 슬레진저 (James Schlesinger) 미국 국방부장관은 1975년 2월 의회에서 주한미군은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기보다는 강대국을 견제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증언하며 남한의 핵무기 배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1975년 4월과 6월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는 유럽과 한국에 우리 군대와 함께 핵무기를 배치해놓고 있다"고 밝히기도 하고, 만약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면 핵무기로 보복할 것이라고 북한을 공개적으로 위협하며 남한에 핵무기를 계속 유지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러한 의회증언이나 기자회견은 다음과 같이 미국의 베트남전쟁 패배에 따른 남한의 핵무기 개발 계획과 관련해 나온 것이었다. 미국은 1969년 7월 발표한 새로운 아시아 외교정책인 '닉슨 독트린'에 따라, 1970년 7월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남한 정부에 통고하고 1971년 3월 1개 사단을 철수했다. 남한은 미국이 이 계획을 연기하거나 취소하도록 노력하는 한편,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대비책으로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1974년 10월 프랑스와 원자력 기술 협력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 1975년 4월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하자, 남한 정부는 1975년 5월 미국이 핵우산을 철수하면 남한은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에 미국은 한미 안보동맹을 파기하고 주한미군과 남한에 배치된 핵무기를 철수하겠다고 위협하며 프랑스로부터의 핵 재처리시설 구입 계획을 취소하라고 압력을 넣음으로써 남한은 핵무기 개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남한에 배치된 핵무기에 관한 미국 의회에서의 증언을 바탕으로 미국의 핵무기 전문가들과 연구소들은 1970년대 중반부터 이에 관한 보고서나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한의 핵무기에 관해서는 '시인할 수도 없고 부인할 수도 없다 (NCND: neither confirm! nor deny)'는 미국 정부의 정책 때문에 무슨 종류의 핵무기가 언제부터 얼마나 어느 지역에 배치되었는지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못했다. 1958년부터 도입되기 시작하여 1970년대 중반에는 최소한 수백개의 핵탄두가 배치되어 있다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남한 사회 안에서는 이러한 추정조차도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85년 5월 국회에서 한 의원이 대정부 질의를 통해 1985년 현재 남한에 핵탄두가 1,000개 이상 배치되어 있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다. 이에 대한 윤성민 국방부장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미국의 핵정책의 하나는 핵의 배치와 관련해서 그 확인, 부인 또는 부연 설명 등을 일체 안하는 것을 관례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방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답변할 수 없다." 2년 뒤인 1987년 9월 국회에서 똑 같은 질문이 나왔을 때 정호용 국방부장관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핵이 없다고 하면 북한이 얕잡아보고 쳐들어올 가능성이 있고, 있다고 하면 비핵지대화 주장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날 우려가 있다. 이 때문에 핵무기는 있어도 있다고 할 수 없고, 없어도 없다고 할 수 없으나 본인도 아는 바가 없다." 1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1988년 7월 국회에서 제기된 핵문제 관련 질의에 대해 오자복 국방부장관은 미국 정부의 '전략적 입장과 원칙'을 되풀이하면서 남한의 핵무기 배치에 대해 확인하기를 거부했다.

이 무렵 미국은 적국인 소련과 핵무기에 관한 정보를 공식적으로 주고받았다. 이 때문에 미국은 남한을 겨냥하여 시베리아에 배치된 소련 핵무기의 수량과 성능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소련 역시 남한에 배치된 미국 핵무기에 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은 자신을 겨냥하고 있던 소련 핵무기에 관해서는 물론 자신이 지니고 있던 미국 핵무기에 관해서도 그 존재 여부조차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국가들은 자국 영토에 배치된 미국 핵무기의 종류, 수량, 성능, 위치 등에 관한 정보를 미국으로부터 받았지만, 남한 정부는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사용에 대해 알거나 협의할 권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남한에 배치된 핵무기에 관한 기초 정보조차 전혀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의 학자들과 언론인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외국의 핵무기 전문가들과 연구소들의 논문이나 보고서를 참고하여 남한에 배치된 핵무기에 관해 제한적으로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달리 이 글은 미국 국무부가 1990년대에 비밀 해제하여 출판한 1950년대 후반의 외교문서 자료집을 바탕으로 미국이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하게 된 시기, 배경과 이유, 그리고 준비 과정 등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북한의 핵무기 개발 및 핵무기에 대한 남한의 인식을 살펴봄으로써, 한반도의 비핵화를 이루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II. 주한미군의 핵무기 배치

1. 핵무기 배치의 배경과 이유

1950년대 초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은 재정 적자가 심각해졌다. 정부 재정을 감축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 가운데 하나가 국방비를 감축하는 것이었고, 국방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규모를 축소하는 것이었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된 무렵엔 30만명 이상이었던 주한미군을 1950년대 중반에는 5만명 안팎으로 크게 줄이게 된 배경이다. 또한 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방비 감축과 아울러 대외원조 축소도 필요했는데, 한국전쟁 이후 미국이 가장 많은 원조를 제공한 나라 가운데 하나가 남한이었다. 예를 들어, 1955년을 전후하여 남한에 대한 미국의 경제 및 군사 지원 액수는 해마다 10억 달러 안팎이었다. 남한은 당시의 병력 수준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는 인력도 없고 경제력도 없었는데, 거의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남한의 병력을 줄이는 것이 미국의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한 급선무였던 것이다.

1956년 9월 열린 국가안보위원회 (NSC)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이 주한미군을 유지하면서도 남한에 해마다 8억 달러를 쏟아붓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으며, 윌슨 (Charles Wilson) 국방부장관은 주한미군 및 남한의 병력을 감축시키지 않고는 미국의 재정 지출을 삭감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래드포드 (Arthur Radford) 합참의장은 남한에 대한 방위비를 줄이는 것은 핵무기를 비롯한 주한미군 장비의 현대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무렵 남한의 공군은 북한의 공군보다 약했지만, 병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육군은 공격력에서나 방어력에서나 북한의 육군보다 강했다. 1956년 7월 작성된 미국의 국가안보위원회 보고서는 남한의 군사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남한의 육군병력은 북한 육군병력보다 거의 2배나 많다. 개인별 장비도 충분하고 잘 훈련되어 있으며 전투 준비가 되어 있다. 남한 육국은 중화기와 야포에서 북한 육군보다 우세하다. 남한 해군은 전투 능력이 없어 보이는 북한 해군보다 확실히 우세하다. 남한 공군은 북한 공군보다 약하다. 남한은 공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병참 지원만 받으면 북한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다.

당시 남북한에 주둔하던 외국군까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남한군 병력은 약 720,000명, 남한 주둔 미국군 병력은 50,000명, 미군과 남한군을 제외한 남한 주둔 유엔군은 약 8,000명이었는데, 이에 반해 북한군 병력은 약 350,000명, 북한 주둔 중국군 병력은 290,000명이었다.

이렇듯 남한의 군사력이 북한의 군사력보다 앞선 상태에서, 막대한 원조의 대부분이 남한의 병력을 유지하는데 지출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남한군 병력을 감축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정부 재정의 70% 이상을 국방비로 쓰면서 무력 북진통일을 이룰 때까지 남한군 병력을 조금도 감축할 수 없다며 미국의 계획에 거세게 반발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생전에 남북통일을 이루는 것인데, 통일은 반드시 무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근본적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 감축은커녕 오히려 병력 증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참고로, 이승만은 1950년대 내내 미국에 몹시 거슬리는 존재였다. 미국은 무엇보다 그의 무력 북진통일을 위한 일방적 군사행동 위협에 항상 긴장하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부터 정전협정을 준비해왔는데 이승만이 이를 반대하자 1952-1953년 사이에 그를 극비리에 제거할 계획을 적어도 두 번이나 세웠다. 이승만은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맺어진 이후에도 이를 무시하며 무력 북진통일을 추구했다. 이에 미국은 만약 남한이 휴전협정을 위반하거나 남한 군대가 일방적으로 북한군이나 중국군에 대해 군사작전을 감행한다면 미국과 유엔사는 이를 어떠한 형태로든 지원하지 않을 것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남한군에 북진 명령을 내리려 하거나 내릴 경우엔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계획을 1955년 1-2월에 세웠다. 이승만은 또한 정전협정을 완전히 폐기시키기 위해 대중 시위를 부추기거나 선동하며, 1950년 6.25 발발 이전에 남한에 속했던 개성, 옹진반도, 한강하구 등을 되찾도록 촉구했다. 이에 이형근 합참의장은 그러한 지역을 되찾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은 남한 군대의 지휘체계에 관해 이승만 대통령과 '격렬한 싸움 (dreadful fight)'을 벌인 뒤 남한 육군이 이승만보다 미국에 충성하겠다고 미국측에 은밀하게 약속했다. 그리고 남한군이 개성과 옹진 지역에서 북한군을 몰아내려 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이승만을 제거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품기도 했다.

한편, 미국은 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남한에 대한 원조를 감축하려면 남한과 일본이 적대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져야 일본이 미국 대신 남한에 원조를 할 수 있고 나아가 한미일 삼국조약 (tripartite treaty)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며 비타협적 자세를 취했다. 이와 관련하여 1957년 6월 국가안보위원회에서 덜레스 (Allen Dulles) 국무부장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이 심각한 재정 문제를 겪고 있다는 사실은 온 세계가 다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말해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남한 병력을 유지할 돈이 없다고 이승만에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승만에게 과거에 취했던 태도보다 더욱 강경한 입장을 확고하게 취해야 한다."

이와 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미국은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할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미국은 재정 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줄여야 했고, 미국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대규모의 남한 병력을 줄여야 했다. 그러나 무력 북진통일을 추구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거세게 반대하자 그를 무마하면서 병력을 감축하는 대신 주한미군의 안전을 위해 남한에 핵무기를 들여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직접적 배경과 이유 이외에 미국이 남한에 핵무기 배치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점들도 고려하였다. 첫째, 80세를 넘긴 고령의 이승만이 곧 죽거나 불구가 되리라 예상되는 터에 그가 사망하면 큰 혼란이 일어나기 쉬울텐데 이를 이용해 북한군이 남침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에 대비해 주한미군이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이 무렵 미국이 남한에 배치하려던 핵무기들은 원자포 (280 mm atomic cannon)와 어니스트 존 핵미사일 (762 mm Honest John atomic rocket)이었는데, 이들은 부피가 매우 크고 무게가 각각 86톤과 16톤이나 되는 등 몹시 무거워 다루기 힘들고 부담되는 무기들이어서 이미 생산이 중단된 상태였다. 그리고 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들 가운데는 이 무기들로 소련을 사정거리 안에 둘 수 있는 나라가 없어 유럽에서는 사용하기 어려웠다. 머지않아 폐기 처분해야 할 핵무기들을 비밀리에 배치할 수 있고 소련을 효과적으로 겨냥할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곳"이 남한이었던 것이다.

셋째, 소련은 1957년 10월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Sputnik) 발사에 성공했다. 핵무기 개발은 미국이 소련보다 앞섰지만 핵무기를 바다 건너 멀리까지 운반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 개발은 소련이 미국보다 앞선 것이다. 이에 대해 주한미군과 한국인들이 겪을 심리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도 미국은 주한미군의 핵무기 배치를 늦출 수 없었다.

2. 핵무기 배치를 위한 준비 과정

미국이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하나는 "한국 경외로부터 증원하는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을 들여오는 것을 정지한다...."고 명시된 한국전쟁 정전협정 규정이고, 다른 하나는 이 규정에 따라 무기와 장비들이 반입되지 못하도록 감시 활동을 벌이는 중립국 감독위원회였다. 한반도에 핵무기를 배치하는 것은 정전협정 위반이고, 정전협정을 위반하면서 핵무기를 반입하더라도 중립국 감독위원회의 감시와 반대에 직면할 것이 확실하기에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핵무기를 들여오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1) 중립국 감독위원회 감시소조 추방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무렵 유엔군과 남한군의 전력이 중국군과 북한군의 전력보다 우세했기 때문에, 미국은 이 상태를 유지하면서 북한측의 군사력 증강을 감시하기 위해 중립국 감독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만들어진 중립국 감독위원회는 1953년 8월부터 정전협정 제 2조 13항의 규정대로 한반도에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탄약 등이 반입되지 못하도록 감시활동을 시작했다. 정전협정 제 2조 37항 및 42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중립국 감독위원회는 4명의 고급장교로 구성하되 그 중의 2명은 국제련합군 총사령관이 지명한 중립국 즉 서전 (스웨덴) 및 서서 (스위스)가 이를 임명하며 그 중의 2명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이 공동으로 지명한 중립국 즉 파란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가 이를 임명한다. 본 정전협정에서 쓴 '중립국'이라는 용어의 정의는 그 전투부대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에 참가하지 않은 국가를 말하는 것이다....

중립국 감독위원회는 그 위원 및 그 중립국 감시소조를 통하여 본 정전협정 제 43항에 렬거한 출입항에서 .... 감시와 시찰을 진행한다.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에 대한 중립국 감시소조의 시찰은 소조로 하여금 증원하는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을 한국으로 들여옴이 없도록 확실히 보장할 수 있게 한다....

이에 따라 스웨덴과 스위스 감시위원들은 북한의 신의주, 청진, 홍남, 만포, 신안주 지역에 주재하고,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감시위원들은 남한의 인천, 대구, 부산, 강릉, 군산 지역에 주재하며 감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적대적 관계에 있는 남북한 정부의 군사적 민감성 때문에 중립국 감독위원회의 활동은 제한되었으며 정전협정 위반 사례를 증명하기 어려웠다.

1954년부터 미국은 북한이 중립국 감독위원회의 감시를 피해 군사력을 증강하는 한편 남한에서 활동하는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감시위원들이 유엔군사령부에 대한 정보수집 활동을 벌인다고 주장하면서 중립국 감독위원회 무력화 및 정전협정 관련 조항 폐기를 추진했다. 중립국 감독위원회를 궁극적으로 해체하기 위한 첫 단계로 스웨덴과 스위스 감시위원들이 북한 지역에서 비무장지대로 철수하기를 원했다. 그러면 남한에 주재하는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감시위원들을 추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1954년 12월부터 영국 및 프랑스와 함께 스웨덴과 스위스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남한에 군대를 보낸 16개국이 이 방안을 지지하도록 설득했다. 특히 국무부는 스웨덴과 스위스가 중립국 감독위원회에서 철수하도록 "모든 가능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두 나라는 선뜻 응하지 않았다.

남한 역시 1955년 초부터 중립국 감독위원회의 해체를 주장하며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감시위원들에게 1955년 8월까지 철수하라고 통고했다. 이승만 정부는 수 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국민을 동원하여 중립국 감독위원회 반대 시위를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그리고 미국에게는 소련을 유엔에서 축출하고 유엔을 다시 조직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미국의 지속적인 압력에 스웨덴과 스위스는 완전 철수 대신 북측과 합의하여 1955년 8월 감시소조를 남북 각각 5개 팀에서 3개 팀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1955년 10월 유엔군사령부는 정전협정 13항 폐기 및 중립국 감독위원회 해체에 관해 북측과 합의를 시도하고, 북측이 거부하면 유엔군사령부가 일방적으로 폐기 및 해체를 선언하겠다고 했다. 이에 스웨덴과 스위스는 3개 팀마저 비무장지대로 철수하자고 북측에 제안했지만, 북측은 1956년 1월 이를 거부하면서 남북 각각 3개 팀에서 1개 팀으로 줄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스웨덴과 스위스는 미국의 지속적인 압력에 따라 1956년 2월부터 원전 철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주한미군 및 유엔군사령부는 1956년 5월 31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북한군과 중국군의 비협조 및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방해 때문에 중립국 감독위원회가 본래 의도했던 기능이 실패했다면서 이 위원회의 활동을 일주일 안에 중지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나아가 1956년 6월 9일 남한의 인천, 부산, 군산에 주재하던 중립국 감시위원단 16명을 판문점으로 추방했다. 남한의 군사력 증강을 감시할 수 있는 장치를 제거한 것이다.

2) 정전협정 일부 조항 폐기

한국전쟁 정전협정 제 2조 13항 ㄹ목 (영문으로는 13d 항목)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한국 경외로부터 증원하는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을 들여오는 것을 정지한다. 단 정전기간에 파괴, 파손, 손모 또는 소모된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은 같은 성능과 같은 류형의 물건을 1 대 1로 교환하는 기초 우에서 교체할 수 있다. 이러한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은 오직 본 정전협정 제 43항에 렬거한 출입항을 경유하여서만 한국으로 들여올 수 있다.... 중립국 감독위원회는 그의 중립국 감시소조를 통하여 본 정전협정 제 43항에 렬거한 출입항에서 상기의 허가된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의 교체를 감독하여 시찰한다.

이렇듯 정전협정에 따르면 북한이나 남한이나 새로운 무기를 도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미국과 남한은 북한이 정전협정을 위반하며 비밀리에 새로운 무기와 장비 등을 반입함으로써 남북 사이에 군사력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헐 (John Hull) 주한미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은 1955년 4월 열린 국가안보위원회에 참석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주한미군과 남한군에 새로운 무기들을 공급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정전협정 13항 ㄹ목을 변경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국무부는 북한이 새로운 무기를 반입한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터에, 미국이 일방적으로 그 조항을 폐기하면 미국이 먼저 정전협정을 위반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면서 이를 반대했다.

미국 국방부는 북한이 정전협정 이후 1956년 초까지 250대 이상의 제트비행기를 포함해 450대 이상의 전투기를 반입한 것이 분명하다며, 주한미군과 남한군의 노후된 무기와 장비를 교체하는 게 매우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핵무기를 포함한 새로운 무기와 장비를 남한에 반입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하나는 정전협정을 일시적으로 중지시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정전협정의 13항 ㄹ목을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유엔군사령부 역시 그 조항을 '유연하게' 해석하여 남한의 오래된 무기를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국무부는 법률 자문단의 조언을 받아 정전협정의 13항 ㄹ목을 아무리 '자유롭게' 해석하더라도 남한에 핵무기를 도입할 수 있다고 추론하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북한에 핵무기가 반입되지 않는 한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하는 것은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며 법적 정당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그와 비슷하게 정전협정을 위반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남한의 핵무기 배치를 정당화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증거가 아직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 세계와 유엔의 반응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데,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하는 것은 미국의 세계 정책과 목표 그리고 지위에 대해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한에 핵무기를 반입하면 공산국들과 중립국들뿐만 아니라 스위스와 스웨덴 그리고 남한에 있는 미국의 많은 동맹국들도 알게 될텐데, 당시 국무부 정보를 바탕으로 이들 동맹국들 가운데서도 반발이 심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국방부는 북한에 핵무기나 그 운반체제가 있다는 첩보를 확인할 증거는 없지만, 정전협정 이후 새로운 무기와 장비가 많이 반입되었으며 머지않아 핵무기 운반체제가 들어갈지 모른다고 주장하며 남한의 핵무기 배치를 법적 문제로 결정할 게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문제로 결정해야 한다고 국무부를 설득했다. 이런 논의를 거쳐 1956년 12월 열린 국가안보회의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결국 국방부의 계획을 시인하게 되었다. 이에 국방부는 스위스와 스웨덴, 미국을 제외한 한국전쟁 참전 15개국, 그리고 유엔과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의 정전협정 위반 사례를 수집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한편, 그 위반 사례들을 모두 모아 출판할 수 있을 때에 맞춰 국방부장관과 국무부장관이 중앙정보부장과 합의하여 남한에 핵무기를 반입하는 시기를 결정하기로 했다.

결국 국무부도 국방부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지만 덜레스 국무부장관은 끝까지 이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1957년 4월 열린 국가안보회의에서 그는 남한에 핵무기가 배치되면 세계 각처에서 심각한 반발을 초래할 것이라며 군사적 이익보다 정치적 불이익이 더 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소련이 중국군이나 북한군에게 핵무기를 넘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믿는다며 북한이 핵무기를 도입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했다. 나아가 미국의 정전협정 위반 및 핵무기 배치는 소련에 엄청난 선전 공세의 빌미를 줄텐데 미국의 우방국들과 동맹국들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할 것이라고 우려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주한미군 및 유엔군사령부는 1957년 6월 21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정전협정 13항 ㄹ목에 대한 '증거 없는 (alleged)' 북한측의 위반 사례를 나열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남북쪽의 군사력이 다시 균형을 이루고 북한측이 정전협정을 지킬 의지를 행동으로 보일 때까지 그 조항에 구속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56년 6월 중립국 감독위원회 감시소조를 추방한데 이어, 남한의 핵무기 배치를 막는 규정을 폐기한 것이다.

3. 최초의 핵무기 배치 시기

미국 국방부가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할 것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늦어도 1956년 1월부터였다. 1956년 1월 6일 열린 국무부와 국방부 합동회의에서 테일러 (Maxwell Taylor) 육군참모총장이 정전협정 13항 ㄹ목이 없다면 남한에 새로운 탱크와 대포 등을 반입할 수 있다며 원자포 및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어니스트 존 미사일을 배치할 수도 있다고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렘니처 (Lyman Lemnitzer) 유엔군사령관은 1956년 1월 30일 남북의 군사력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주한미군이 핵무기를 갖는 게 매우 바람직하다는 내용의 전문을 육군부에 보냈다.

래드포드 합참의장은 1956년 9월 윌슨 국방부장관에게 극비 전문을 보내 핵무장을 비롯한 주한미군 장비의 현대화가 지체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유엔군사령관이 중립국 감독위원회에 통보하지 말고 즉각적으로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남한에 대한 군사 원조를 줄이는 게 미국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그는 핵무기를 포함한 군사력의 현대화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무부는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하는 것이 한반도에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탄약 등의 반입을 금지하는 한국전쟁 정전협정 13항 ㄹ목에 위반되기 때문에 반대 의견을 피력하였지만, 1956년 12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국방부의 주장에 찬성함으로써 주한미군의 핵무장이 공식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덜레스 국무부장관은 1957년 5월 14일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은 "더욱 현대적이고 더욱 효과적인" 무기를 남한에 배치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했으며, 윌슨 국방부장관은 이 새로운 무기들은 재래식 성능과 핵 능력을 겸비한 "이중 성능 무기들 (dual capability weapons)"을 포함한다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결정에 감사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1957년 6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데 이어, 1957년 8월에도 편지를 보내 무슨 종류의 현대적 무기가 언제 얼마나 남한에 들어오며, 장비의 현대화 프로그램이 주한미군에만 적용되는지 또는 한국군에게도 적용되는지 물었다. 이에 국무부는 1957년 9월 다울링 (Walter Dowling) 주한미국대사에게 전문을 보내 이승만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알리도록 했다. "주한미군 제 7사단과 24사단은 (원자력으로 무장한 5개 전투단으로 편성된) 펜토믹 (Pentomic) 사단들로 재편성될 것이며,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미사일 부대인 제 100 야전포병대대와 280mm 원자포 부대인 제 663 야전포병대대가 남한에 배치될 것이다."

사실 핵무기 배치를 남한에 알리는 문제는 논란거리였다. 1957년 6월 열린 국가안보회의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남한의 핵무기 반입에 대해 아무에게도 알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에 래드포드 합참의장은 핵무기 반입을 남한에 알리지 않고는 병력 감축을 납득시킬 수 없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남한에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남한 정부가 1957년 12월까지도 병력 감축에 대해 동의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핵무기 반입을 반드시 알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1957년 12월 28일까지 핵무기 도착 소식을 듣지 못하자, 핵무기 반입이 자주 연기된다면서 큰 불만을 표출했다. 그는 그 무기들이 도착하기 전에 남한군 감축을 어떻게 동의할 수 있겠느냐는 하소연과 함께 그 무기들이 정말 반입되는지 의문을 품기도 했다.

국무부는 1958년 1월 8일 국방부에 전문을 보내 정확하게 언제 원자포와 미사일을 배치할 것인지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원자포 미사일 부대를 비밀리에 이동하기로 국무부와 국방부가 합의했지만, 이 무기들이 한국에 도착하면 한국인들은 공식성명과 언론을 통해 이를 밝히려 할텐데, 이는 일본과 극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국무부가 배치 시기에 관한 계획을 미리 아는 게 중요하다는 취지였다. 이러한 국무부의 요청에 대해 국방부는 1958년 1월 16일자 답신을 통해 원자포 미사일 부대가 1958년 1월 안으로 남한에 배치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이렇듯 1994년 출판된 1950년대 미국 국무부의 외교문서들에 따르면, 주한미군은 늦어도 1958년 1월부터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1년 작성된 미국 태평양사령부 (United States Pacific Command)의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핵무기는 1957년부터 남한에 배치되어 1991년 철수했다고 한다. 미국의 주요 신문인 『와싱턴포스트』 역시 "미국은 1957년부터 남한에 핵포병부대를 설치하고 핵무기가 탑재된 미사일을 들여놓기 시작했다"고 2006년 10월 보도했다. 남한에 핵무기가 최초로 도입된 때가 1957년 말인지 1958년 초인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글쓴이는 "늦어도 1958년 1월"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참고로, 주한미군은 280 mm 원자포와 어니스트 존 핵미사일이 남한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1958년 1월 28일 확인했으며, 1958년 2월 3일 이 무기들을 공개하고, 1958년 5월 1일 시험 발사했다.

III. 북한의 핵무기 개발

1. 남한의 핵무기 배치에 대한 북한의 대응

주한미군 및 유엔군사령부가 1957년 6월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정전협정 13항 ㄹ목의 효력 정지를 일방적으로 선언하자, 북한은 이에 대해 정전협정을 파탄시키고 남한을 미국의 핵전쟁 기지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1957년 11월 열린 유엔 총회에서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들은 당시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던 북한을 대신하여 유엔군사령부가 남한에 핵무기를 도입하려는 결정을 비난했다. 이에 미국 대표는 남한의 핵무기 도입은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을 상쇄시키기 위한 '구제 행위 (remedial action)'에 불과하다고 대꾸했다.

나아가 남한에 핵무기가 배치되기 시작하자 북한은 다음과 같은 대응책을 마련했다. 첫째, 방위 시설을 외부의 폭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960년대부터 대대적으로 '전국토의 요새화' 작업을 시작했다. 김일성은 1963년 온 나라를 요새화함으로써, 원자탄을 갖지 않고도 원자탄을 가진 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며 지하 터널을 파야 한다고 했다. 전선 지역뿐만 아니라 후방 지역에도 공장을 포함한 모든 주요 군사 시설과 산업 시설까지 지하에 건설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슈워츠 (Thomas Schwartz) 주한미군사령관은 2001년 3월 미국 상원에서 북한 전역에 걸쳐 1만개 이상의 지하 방어시설이 건설되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특히 비무장지대 (DMZ) 중서부 산악지대에는 수백개의 지하동굴과 벙커가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평양시내 지하철이 수직으로 약 100m 지하에 건설된 것도 비상시에 방공호로 쓰기 위한 것이라고 글쓴이가 1998년 10월 평양을 방문했을 때 안내원이 확인해주었다.

둘째,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북한군에게뿐만 아니라 주한미군과 남한군에게도, 그리고 남북의 군인들에게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에게도 타격을 줄 수 있도록 '적을 껴안는' 전략으로 병력을 전진 배치시켰다. 휴전선 근처에 전진 배치된 북한군을 핵무기로 공격하면 남한의 전방에 배치된 주한미군과 남한군은 물론 인근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도 방사능 피해를 당할 수 있기 때문에 핵무기를 함부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김일성은 남북의 병력이 서로 뒤섞여 전투를 하면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슈워츠 주한미군사령관은 2001년 3월 미국 상원에서 북한 현역군의 70%가 휴전선에서 약 150km 안에 배치되어 있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

셋째, 자체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도록 1963년 소련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이에 소련은 핵무기 개발은 도와줄 수 없다고 거절하는 한편, 우방국인 북한을 달래기 위해 평화적 목적의 원자력 개발은 지원할 수 있다며 1965년부터 영변에 원자력 발전소를 세우는데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북한의 핵 과학자 300여명이 소련에서 20여년 동안 훈련을 받았으며, 이에 따라 북한은 소련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영변의 원자력 발전소를 확장하여 궁극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미국의 의심을 1980년대부터 받게 되었다.

넷째, 1964년 중국이 원자탄 실험에 성공하자 김일성은 베이징에 대표단을 보내 북한도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구했다. 마오쩌뚱에게 편지를 보내 전쟁터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형제 국가끼리 원자탄의 비밀을 공유하자고 한 것이다. 그러나 마오쩌뚱은 김일성의 부탁을 거절했다. 북한 같은 조그만 나라가 핵무기까지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2. 북한의 핵무기 개발 배경

앞에서 보듯, 북한은 1958년 남한에 핵무기가 배치되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대비를 해오면서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다 남한이 1974년부터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핵무기를 개발하려 한 사실이 알려지자 김일성은 다시 중국에 핵무기 개발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지만 중국은 거부했다. 이에 따라 북한도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나서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엔 몇 가지 배경과 이유가 있다.

첫째, 지리적으로 한반도는 세계 4대강국에 둘러싸여 있다. 특히 북한은 북쪽으로는 중국과 러시아에 그리고 남쪽으로는 남한에 가로막혀 있는 가운데, 바다 건너 서쪽으로는 중국에 그리고 동쪽으로는 일본과 미국에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이렇듯 북한을 둘러싸고 있는 4대강국과 남한은 모두 늦어도 1960년대까지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했거나 미국의 핵무기를 배치해놓고 있었다.

참고로 1958년부터 남한에 배치되어 있던 핵무기는 1991년 말까지 철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과 소련은 1991년 7월 31일 두 나라가 보유한 핵무기를 1/3 정도씩 줄인다는 내용의 전략무기감축협정 (START Treaty)을 맺었는데, 이에 따라 남한에 배치되어 있던 핵무기를 철수시킬 계획에 대해 부쉬 대통령이 1991년 11월 5일 승인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작성된 미국 태평양사령부의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2,000개 이상의 핵무기는 모두 철수하더라도 해군 핵무기는 '적당한 때에' 재생하거나 재배치할 수 있도록 했고, 핵무기 저장시설도 유지하도록 했다. 그리고 미국은 2008년 현재까지 남한에 대해 지속적으로 핵우산을 제공할 것을 다짐해왔다. 여기서 '핵우산'이란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가 핵무기를 갖지 않은 동맹국의 안전을 핵무기로 보장해주는 것을 가리킨다. 남한이 적대국으로부터 핵무기 공격을 받으면 미국이 핵무기로 보복해준다는 것이니, 남한은 방어용 핵무기를 무수하게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 북한은 소련으로부터든 중국으로부터든 핵우산을 제공받은 적이 없다. 북한을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모든 나라들이 다양한 핵무기를 다량으로 배치해놓고 있거나 적어도 미국의 핵우산을 받고 있는 마당에, 북한만 자체 핵무기도 없고 다른 나라의 핵우산도 받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경제적 측면에서 핵무기 개발은 주한미군이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했던 가장 큰 이유처럼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안보효과를 얻을 수 있다. 1970년대부터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의 경제력을 앞서게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격차가 커지자 북한은 남한과 재래식 군비경쟁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1990년대 들어서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에 처하게 되면서 북한의 국민총생산 (GNP)은 대략 미국의 1/600 수준이요, 남한의 1/30 수준이다. 빈약한 경제력 때문에 전투기나 함정 같은 재래식 무기경쟁은 도저히 할 수 없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경제난 때문에 대량파괴무기를 개발해온 것이다. 대량파괴무기를 조금이라도 갖게 되면 안보에 대한 걱정 없이 재래식 무기 유지 및 증강에 들어갈 비용을 경제개발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은 2003년 6월 “우리가 핵 억제력을 갖추고자 하는 것은 그 누구를 위협하고 공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재래식 무기를 축소하며 인적 자원과 자금을 경제건설과 인민생활에 돌리려는 데 있다”면서, “미국이 조선에 대해 적대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자금이 적게 들면서도 그 어떤 첨단무기나 핵무기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물리적 억제력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핵무기 개발의 경제성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미국이 핵무기 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고 위협해온 터에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으로 재래식 군비증강을 꾀하기 어려우니 값싸게 핵무기로 무장해놓고 군비를 줄여 경제성장에 힘쓰겠다는 뜻이다.

셋째,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걸쳐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들이 무너지자 북한은 체제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전통적 우방국인 소련과 중국으로부터의 지원이 끊어지거나 줄어지는 터여서, 북한은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핵무기와 미사일개발 카드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냉전이 끝나면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남게 된 미국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저지를 탈냉전시대, 특히 2001년 9.11 이후 대외정책의 핵심목표 가운데 하나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IV.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하여

1. 핵무기에 대한 남한 국민의 인식

핵무기는 1945년 세계 최초로 미국에서 개발되었다. 미국의 뒤를 이어 소련이 1949년, 영국이 1952년, 프랑스가 1960년, 그리고 중국이 1964년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 이러한 핵무기가 실제로 사용된 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이자 2008년 현재까지는 마지막으로 1945년 8월이었다.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떨어뜨린 게 유일한 사례인 것이다.

미국의 핵무기 때문에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항복했고 이 때문에 조선의 해방이 앞당겨졌지만, 핵무기에 따른 조선인들의 피해도 매우 크고 끔찍했다. 한 조사에 따르면, 1945년 8월 핵폭탄의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은 히로시마에서 42만명, 나가사키에서 27만명으로 총 69만여명인데, 이 가운데 조선인은 히로시마에서 5만명, 나가사키에서 2만명으로 총 7만여명이라고 한다. 방사능 노출로 죽은 사람은 모두 23만여명인데, 이 가운데 조선인은 약 4만명으로 추정된다. 조선인이 전체 피폭자 가운데서는 약 10%이며 폭사자 중에서는 약 17%를 차지한 것이다.

미국의 핵무기에 우리 민족이 이렇게 큰 피해를 입었지만 미국의 핵무기 때문에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인식 때문인지 우리는 핵무기의 엄청난 파괴력과 끔찍한 피해에 대해 유달리 무감각했다. 예를 들어, 1970년대 말 소련의 인공위성에 장착된 핵연료 추진장치가 고장을 일으켜 우주궤도를 이탈해 지구상에 떨어진 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다. 그 때 세상은 온통 그 핵물질이 자기나라 땅에 떨어질까봐 공포에 질려있었다. 바다로 유도해 떨어지게 하는 방법을 마련하는 나라도 있었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예상 지역에 비상령을 내리고 주민들의 대피를 준비하는 국가도 나오는 등 세계가 발칵 뒤집히다시피 했다. 그렇게 온 인류가 새파랗게 질려있을 때 우리나라에서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한다는 한 신문은 그 핵물질이 "제발 평양에 떨어져 주소서!"라고 기원하는 만화를 실었다. 북한을 적으로만 생각하던 냉전시대였으니 평양이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 통쾌하게 지켜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핵물질이 평양에 떨어졌다면 북한의 무고한 인민들은 물론 남한의 많은 사람들도 방사능 노출에 따른 피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 대학생들이 전쟁 반대 및 핵무기 반대를 주장하자 대부분의 남한 언론은 이를 거세게 비난했다. 예를 들어, 한 신문은 "미국의 핵우위와 미국의 핵우산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존립하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고, 다른 신문은 1986년 3월 20일 사설에서 "우리가 미군의 상주를 필요로 하고 위험부담을 안은 채 그들의 핵 지원을 마다하지 않으며 .... 한미 합동 군사훈련 팀스피리트를 해마다 하는 이유는 불을 보듯 환하다. 즉 살아남기 위해서인 것이다"고 했다. 또한 당시 언론은 학생들의 반전ㆍ반핵 주장에 대해, 학생들이 "북괴의 구호를 대변해서" 외친다고 하거나 "이러한 주장들이 고스란히 북괴의 최근 대남 모략선전과 정치선동의 내용들과 일치하고 있다"고 하면서 반전ㆍ반핵 주장을 친북 행위로 매도하기도 했다.

1970년대 미국의 슬레진저 국방부장관이 밝힌대로, 남한에 배치된 주한미군의 핵무기는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기보다는 강대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미국은 1980년대 초부터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낌새채고 1980년대 말부터 이에 대해 확신을 가져왔으면서도, 1991년 소련의 위협이 사라지자 남한에서 핵무기를 철수했다. 미국과 소련의 경쟁 때문에 무려 34년 동안 남한 전역에 무수한 핵무기가 있었는데도 우리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거나, 알면서도 그 위험성을 느끼기보다는 핵무기 때문에 안전하게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졌던 것이다.

우리가 핵무기의 공포에 대한 불감증에서 벗어난 것은 2006년 10월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고 발표했을 때였다. 그 무렵 남한 사회에는 금세 핵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공포감이 조성되었고, 이와 아울러 북한을 어떻게 응징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뜨겁게 전개되기도 했다. 주한미군의 핵무기는 한반도 평화와 남한의 안전에 꼭 필요했지만, 북한군의 핵무기는 한반도 평화와 남한의 안전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는 불균형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2. 북한 핵무기의 폐기를 위한 발상의 전환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한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주한미군의 핵무기든 북한군의 핵무기든 모두 폐기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반도의 비핵화'와 관련하여 남한에서는 북한의 핵무기 폐기만을 강조하지만, 북한에서는 주한미군의 핵무기 및 남한에 대한 핵우산도 모두 폐기되는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하도록 이끌기 위해서는 역지사지 (易地思之) 정신이나 자세를 가져볼 필요가 있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1980년대 북한이 핵무기를 갖지도 않고 소련이나 중국의 핵우산을 받고 있지 않을 때, 남한은 핵무기 때문에 존립할 수 있다거나 살아남기 위해서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핵무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철이 없거나 친북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렇다면 한편으로는 소련이 해체되고 사회주의 동맹국들이 사라져버렸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이 남한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남한에 핵우산을 제공하며 북한 체체의 붕괴를 추구하는 마당에, 북한은 생존을 위해 더욱 절실하게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보유하리라 생각할 수 있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얻으려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경제보상과 체제보장이다. 첫째, 경제보상은 핵무기를 만드는 재료인 플루토늄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원자력발전 시설인 흑연감속로를 북한이 폐기하는 대신, 핵무기 개발에 이용되기 어려운 원자력발전 시설인 경수로를 미국이 건설해주고 그것이 완공될 때까지 에너지를 제공해달라는 것이다. 둘째, 체제보장은 불가침조약이나 평화협정 또는 국교정상화를 의미한다. 북한과 미국이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어정쩡하게 멈춘 한국전쟁을 법적으로 완전히 종결지으며 평화적으로 공존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경제보상을 위한 물적 담보인 경수로 건설 완공과 체제보장을 위한 물적 담보인 주한미군 철수 완료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자신의 핵무기 및 핵시설을 폐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반해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및 핵시설이 폐기될 때까지는 경수로에 관한 논의조차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한편, 한반도가 통일되더라도 초강대국으로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유지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남한은 북한보다 경제력과 외교력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면서도 한미동맹 강화를 추구하며 주한미군과 미국의 핵우산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기를 원한다. 이런 상태에서 이른바 체제 붕괴 위기에까지 몰린 북한이 핵무기와 핵시설을 폐기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해서는 역지사지를 통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북한이 생존과 체제 유지에 대한 우려 없이 핵무기와 핵시설을 폐기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철수 및 미국의 핵우산 제거 그리고 한미동맹의 폐기를 준비하지 않으면서 북한의 핵무기 폐기를 주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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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1 11:30:23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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