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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천과 담배와 해오라비와
작성자 : 鄭洋  (홈페이지)


<여러 해 전에 썼다가 잊고 있었던 글을 최기우님이 어떻게 어떻게 찾아줘서
한번 되새겨볼까 하고 여기  올려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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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천과 담배와 해오라비와  

  30년 넘게 전주에 사는 동안 나이 드신 분들이 자주 모이는 다방이나 기원, 혹은 무슨 기념식이나 강연회 같은 데에 가게 될 때면, 인사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면서도 피차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낯익은 이들이 더러 있다. 인사를 나누게 된다면 금세 친해질 것 같은 사람들, 나에게 있어 전주의 이런 저런 명소들은 언제부턴가 그런 정도의 낯익은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거리감과 아쉬움과 친화감이 범벅이 되어 있는 곳들이기도 하다.

  전주에 사는 동안 전주의 명소들이 어떤 곳인가를 알기 위하여 나는 단 한 번도 일부러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본 일이 없다. 그런 일은 관광객들의 몫이거니 싶기도 했고, 또 일부러 기웃거리지 않더라도 필요하다면 언제든 알아볼 길이 얼마든지 있지 않겠느냐는 게으름이 한 몫 거들기도 했을 것이다. 무슨 행사나 누구를 만날 일이 있거나 해서 가보면 거기가 바로 오목대나 덕진이나 왕릉이나 경기전이나 한벽루 근처였고 또 가까운 등산길을 택하다 보면 기린봉이니 남고산성이니 고덕산이니 황방산 같은 데를 오르내리게 되곤 했다. 남문이나 객사 근처를 지나칠 때도 그저 여기가 고도니까 저런 게 있나보다 싶었고 동문 네거리나 서문교회 앞에서도 이름만 남은 동문․ 서문이 별로 안타깝지도 않았다. 나는 그런 곳에 가게 될 때마다 발길을 멈추고 거기 세워져 있는 안내문들을 읽어본 적이 없다. 거기 기록되어 있을 내용들이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고 읽어본들 금세 잊어버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안내판들에 적혀 있을 내용들을 그 동안의 귀동냥 덕으로 대충은 알고 있다.

  나는 아직껏 전주에 사는 것을 남에게 자랑삼아본 일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을 부끄럽게 여긴 일도 없다. 꼭 전주에서 살아야겠다는 남다른 집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직장 따라 전주라는 데에 와서 그럭저럭 이제껏 눌러앉아 살게 된 것이다. 전주가 조선의 연원지라고 하는데, 나는 지금도 조선이라는 나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탐탁찮게, 혹은 부끄럽거나 야속하게 여기는 이유는 어쩌면 군신유의니 부자유친이니 형제우애, 붕우유신 등등 삼강오륜의 그 어느 덕목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그들 쿠데타의 주역들과 그 후예들이 끝끝내 그 삼강오륜을 깃발처럼 내세우는 뻔뻔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도둑이 제 발 저리듯 툭하면 역모죄라는 걸 헌 칼처럼 내둘러 수시로 억울한 떼죽음을 양산하던 일 등등, 하여튼 이 자리에서 그 이유를 분명하게 따져볼 일은 아니지만 그런 비슷한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전주가 조선의 연원지라는 사실이 전주에 사는 나로서는 문득문득 맘에 걸린다. 그 동안 몸에 익힌 전주의 이런저런 풍광을 나도 모르게 좋아하게 된 때문일 것이다. 전주의 여러 풍광 중에서도 나는 지금껏 전주천변의 풍광을 제일 좋아한다. 북쪽으로 머리를 두르고 흐르는 이 전주천 때문에 전주는 오랜 세월 반역의 땅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고 그런 이유 때문에 전주 사람들이 제대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면서 그 반역의 실례로 정여립을 거론하는 이들이 지금도 더러 있다. 전주천이 역천지수逆天之水요, 그래서 전주가 그들 말대로 반역의 땅이라면 그 실례로 거론되어야 마땅했을 인물은 정여립이 아닌 이성계라야  말이 된다.

  계급질서가 완고하던 시대에 양반과 평민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대동계를 만들어 힘을 모아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던, 그리하여 모두 함께 잘 사는 대동세상大同世上을 이루려던 정여립의 꿈은 정말 반역이었을까. 백성들의 꿈을 짓밟고 기축옥사를 날조하여 일천 명이 넘는 무고한 목숨을 빼앗아간 역사가 정의였을까. 전주를 근거삼아 곳곳에 집강소를 만들어 만민평등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을 비롯한 갑오농민전쟁 주역들의 행적과 이 지역의 항일운동들이 다 반역인가 그들을 처형하고 감옥에 보냈던 일이 아직도 정의인가. 80년대를 휩쓸던 이 지역의 민주화운동, 이 나라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이세종․ 조성만 열사들의 죽음이 모두 반역인가. 그런 것들이 다 반역이라면 역천지수라는 이름을 얼마든지 자랑삼겠다는 듯이 전주천은 오늘도 북으로 북으로 도도히 흘러가고 있다.

  1970년 가을, 내가 처음 전주로 직장을 옮긴 데가 다가교 건너 전주천변에 자리잡고 있는 신흥고등학교였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던 나는 기독교 분위기의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 중 힘들었던 게 학교 안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것이었다. 당시 신흥학교 선생님들 중에는 나 말고도 담배를 피우는 이들이 여럿 있었고 학교 안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는 데가 몇 군데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해 가을, 나는 틈만 나면 자전거를 끌고 교문을 빠져나와 학교 바깥에서 맘 놓고 담배를 피우다가 수업시간에 딱 맞추어 부랴부랴 교실로 직행하곤 했었다.

  고등학교 학생 시절에 나는 몰래 피우는 재미가 없으면 그게 무슨 맛이겠느냐 싶어서 학교만 졸업하면 담배를 끊으리라 맘먹었던 적이 있다. 신흥학교 재직 시절에도 나는 그 비슷한 생각을 좀 했었다. 직장을 유지하기 위하여 담배를 끊는 것은 치사한 일 아니냐, 뭐 그런 비슷한 오기를 두르고 살았던 것 같다. 하여튼 그 무렵 나는 틈만 나면 일삼아 담배를 피우러 학교 바깥으로 나가곤 했다. 밖으로 나가면 곧장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웠지만 그 아무데라는 곳들이 대개 전주천변이었다. 당시의 전주천변은 지금과는 달리 좁고 비포장이었고 한적했다. 대개는 학교 바로 앞 다가산 근처에서 담배를 피웠지만 시간이 좀 넉넉할 때는 한벽루 근처까지 거슬러가거나 서신교 아래까지 내려가곤 했다. 담배를 핑계삼아 그 가을 내내 자전거를 타고 전주천변의 풍광을 나는 만끽했던 것이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한벽루 근처의 냇물에 부서지는 가을 햇살, 냇물로 흘러들 듯 두근거리는 산자락의 단풍, 남문시장 근처의 수더분하고 훈훈하고 잔잔한 사람 냄새, 완산칠봉에서부터 어은골을 지나 저 아래 서신교에 이르기까지 산능선을 따라 한눈을 팔지 못하도록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 그 단풍과 가을 햇살들이, 아기자기하고 훈훈하고 더러는 쓸쓸하기도 한 사람 사는 자취들이 내 담배맛을 한결 돋구어 주곤 했다. 전주천변의 그 가을 풍광 때문에, 직장을 옮기게 된 일이 스스로 대견스럽기도 했고 두근거리기도 했던 기억을 나는 오래오래 잊을 수가 없다.

  몇 해 전부터 나는 다행히 전주천변에 살고 있다. 삼천천과 전주천이 만나는 두물머리, 산처럼 쌓여 있던 묵은 쓰레기 더미를 치우고 그 자리에 새로 닦아놓은 공원 근처에 우리집이 있다. 아침저녁으로 천변을 걷는 사람들, 천변을 오르내리며 뛰는 사람들, 두루민지 해오라빈지 해누이인지 아니면 또 무슨 이름의 천연 기념물인지 모를 하얀 새들이 인사는 나누지 않아도 피차 낯익다. 사람들이 걷거나 뛰거나 말거나, 나 같은 사람이 아직도 담배를 못 끊고 쿨룩거리며 맛있게 담배를 피우거나 말거나, 역천지수든 반역이든 부끄러운 역사든 모두 다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이 눈부시게 부서지는 햇살을 쪼아먹으며 낯익은 하얀 새들은 오늘도 전주천변을 한가롭게 오르내리고 있다.



[2007-01-17 15:14:31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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