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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편지 19. 곯은 씹에 젓국 치듯 --김영춘 선생께 2005-12-22 15:53
작성자 : 鄭洋 


곯은 씹에 젓국 치듯

실로 오랜만에 새벽편지를 씁니다. 엊그제 월례토론회 때 만날 뻔했다가 못 만났군요. 앞니를 다섯 대나 뽑고, 그 후유증으로 밖에 나가질 못했습니다. 요즘은 또 곯은 씹에 젓국 치듯, 독감을 앓고 있습니다.

곯은 씹에 젓국 친다는 말,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듣는 이가 많던데, 우리 김영춘 시인도 혹시 처음 듣는 말은 아닌지요? 엎친 데 덮친다든지 설상가상이라든지 하는 말을 보다 절망적으로 보다 처연하게 체험적으로 해보는 좀 유식(?)한 말에 속합니다. 짐작하거니와 그 말은 아마도 화류계에서 자주 쓰이던 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유식하다는 표현은 그 말을 모르는 이들이 많은 점을 감안해서 짐짓 해보는 말이죠. 어쨌든 지난번 노골적으로 무식하게 첫눈이 내린 뒤에, 그 노골무식한 맛을 더 즐기기라도 해야겠다는 듯이 눈이 또 무지무지 내리고 있습니다. 지난번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도 못한 판에, 그야말로 곯은 씹에 젓국 치는 격이죠.

재작년 겨울쯤이었던가요. 이병초 시인이 여기 홈피에다

“동네 사람덜, 눈이 좆나게 와부렸네요,
눈이 또 내린 다음날 아침,
”어저끄 온 눈은 좆도 아니구만요,“
또 눈이 내린 그 다음날 아침,
”인자 우리동네는 좆돼야부렀습니다.“  

했더라는 어느 눈 내리는 마을 이장님의 새마을방송을 소개한 일이 있었는데,
오탁번 시인은 또 그 새마을방송을 그대로 시로 만들어서 시안 겨울호에 실렸던데,
폭설로 인한 참상이 이렇게 농담도 되고 시가 되기도 했던가본데,
퍼붓는 폭설의 이 노골무식한 행패를 한겨울의 당연한 정취쯤 여기며
눈이 더 내리기를 기다리는 나같은 이들도 있기는 있나보던데,    

지칠 줄 모르는 눈보라를 창 너머로 건너다보면서, 지칠 줄 모르고 절망적으로 눈을 기다리는 이들을, 눈에 묻혀 사라진 길을 열던 노래 속의 빨찌산을, 눈보라치는 고속도로에서 길 막혀 오도가도 못한다는 이들을, 지척이 천리인 듯 오도가도 못하고 서로 보고만 싶은 이들을 생각합니다. 내 이빨 무식하게 뽑아내던 치과의사를, 내 숨 막히거나 말거나 입안에 고이는 핏물을 한사코 씻어내던 간호사를, 노골무식한 변강쇠를, 밤에 황제와 잠자리를 즐기고도 욕정을 삭일 길이 없어 낮이면 사창가에 찾아가서 스스로 매음을 하고 사창가의 문이 닫힌 뒤에야 환궁했다던, 지칠 줄 모르던 로마의 황녀 메살리나를 생각합니다. 자살한 농민들을, 맞아죽은 농민들을, 농협에서 빚낸 돈으로 홍콩까지 건너가서 두들겨 맞는 지칠 줄 모르는 그 절망을 생각합니다. 지칠 줄 모르고 퍼붓는 눈보라를 보고 있노라면 그 절망들이 모두 너무 가까이 있는 것만 같은 처연한 착각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눈에 젖을 듯 펑펑 내리는 눈도, 바라보는 눈길이 아프도록 휘날리는 눈보라도, 곯은 씹에 젓국 치듯 하는 이 세상의 온갖 쓰라림도 견디다 보면 悽然한 힘이 된다고, 오늘 밤에도 호남에는 지칠 줄 모르고 눈이 쏟아집니다. 우리 김영춘 시인도 혹시 저 눈보라를 바라보고 있나요?


-2005-12-22 15:53 에 쓴글-

[2006-12-01 16:41:24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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