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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편지 17. 태산처럼 쏟아지는 잠 1. 2004-06-03 17:16
작성자 : 鄭洋 





  태산처럼 쏟아지는 잠 1.


  오늘이 5월 6일, 일주일이나 묵은 감기가 아직도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늘 태산에 가기로 약속한 날인데 이놈의 감기 때문에 또 약속을 어기게 되면 어쩌나 싶어 걱정이다, 내 열이 오르면 아내는 나를 또 못 나서도록 말릴 게 뻔하다. 지난밤에는 열도 오르기 전에 아내 몰래 감기약을 미리 먹어두었다. 태산행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나는 어제부터 감기가 다 나은 것처럼 행세하는 중이다. 새벽 3시. 약기운이 떨어지는 듯싶어서 또 약을 먹었다. 于飛군(산동사범대 한국어과 학생)이 나를 데리러 오려면 아직도 4 시간이나 남았다.

  잠이나 좀 자두어야지 싶은데 약기운 탓인지 영 잠이 오지 않는다. 약기운 탓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제껏 맘먹은 대로 잠든 일이 거의 없다. 맘먹고 잠을 좀 자 둬야지 싶을 땐 영락없이 밤을 밝히고 만다. 잠을 못 자면 오며가며 차 안에서 토막잠으로 땜질하리라... 감기약을 먹은 주제에 술을 마실 수도 없어서 그냥 견디기로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약속된 시간보다 10분이나 먼저 온 于飛君이 그나마 다행스럽다.            

  火車站(기차역)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붐볐다. 지금이 노동절 휴가기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 거리에서는 이층 버스들이 가끔 눈에 띄곤 했는데, 오늘 우리가 탄 기차도 2층 기차다. 시야가 넓은 2층에 자리잡고 갔으면 싶었지만 미리 끊어 놓은 차표가 1층 좌석이어서 그냥 정해진 좌석을 찾아 앉았다. 어차피 잠이나 자면서 갈 길, 1층이든 2층이든 그게 무슨 대수랴 싶었는데, 막상 자리를 잡고 보니 이건 또 상황이 다르다. 자리도 좁고 딱딱할 뿐만 아니라 세 사람씩 마주 앉은 앞좌석과의 거리가 서로 무릎을 비껴야 할 만큼 너무 가깝다. 앞에 앉은 중년 부부의 주고받는 억양이 강한 중국말이 내 귀에는 마치 서로 싸우는 소리처럼 들린다. 돈을 더 내면 좋은 자리로 옮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여기는 1등칸,2등칸 같은 구분이 애당초 없고, 또 장거리 기차가 아니어서 침대칸도 없다고 한다.

  나는 눈이라도 좀 감아보려던 생각을 접고 아예 차창 밖만 바라보기로 한다. 차창 밖에는 가끔 돌산들이 보인다. 기암괴석이 눈길을 끄는 그런 돌산이 아니라 나무 한 그루 없는 돌무더기들이 그냥 무미건조하게 피라밋처럼 쌓여 있는 돌산, 물결처럼 넘실거리는 산 아래 밀밭들이 훨씬 더 눈길을 끈다. 저 밀밭 속에 쓰러져 마구 잠들 수 있다면 참 행복할 것 같다. 차창 밖을 보기 위하여 왼쪽으로 왼쪽으로만 젖힌 목뼈가 자꾸 뻐근하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있더라는 옛시조를 굳이 이렇게 확인해야 하는 건지, 나는 태산이 보이기 전부터 이미 지쳐 있다. 태안 시가지를 가로질러 택시로 태산을 찾아가는 길 저쪽에 태산의 준령들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아닌 게 아니라 허허벌판인 이곳 산동땅에서는 저것을 이 세상에서 제일로 크고 높은 산으로 여기기도 했음직한 산세다. 높고 그들막한 그 산세 앞에서, 걱정이 태산이라는 둥 그리움이 태산이라는 둥 하는 말들을 되새겨본다.
  
  내 걱정 내 그리움은 정말 저 태산만 한가. 실감이 나지 않는 중에도 나는 쏟아지는 잠이 태산 같다. 해발 1550미터 밖에 안된다고, 걱정이나 그리움이나 잠 같은 것이 아무리 태산처럼 쏟아질지라도 겁먹지 말라고, 우리를 태운 24인승 태산 구내버스는 경쾌하게 태산을 굽이굽이 뱀처럼 누비며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가고 있다. 아카시아 숲이 유난히 많다. 가도가도 띠처럼 굽은 길 양쪽이 거의 다 아카시아 숲길이다. 제남에서는 시든 지가 한참 됐는데 여기는 아카시아 꽃이 또 한창이다. 가뭄타는 골짜기로 아카시아꽃이 눈처럼 흩날린다. 태산 같이 쏟아지던 잠은 어느듯 어디로 가고 태산 같은 아카시아 꽃냄새로 숨이 막힌다. 이 숨 막히는 꽃냄새는 꿈인가 잠인가 걱정인가 그리움인가.



- 2004-06-03 17:16에 쓴글 -

[2006-12-01 16:40:13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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